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꿈과 현실, 환상과 기억이 뒤엉킨 내러티브 속에서 한 여성의 무의식을 탐색합니다. 관객은 영화의 불확실한 구조 속에서 자아와 욕망, 억압과 정체성의 단서를 따라가게 됩니다. 이 영화는 단순한 이야기의 전달이 아니라 감정과 인식의 붕괴 속에서 무의식의 진실을 마주하게 만듭니다.
자기 반영성 영화, 영화가 뭔지 이제부터 알려 줄게 !
이 영화는 무의식의 환상과 영화라는 매체가 얼마나 닮아 있는지를 드러내는, 탁월한 자기반영적 작품입니다. 영화는 자신이 영화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드러냄으로써 '영화 만들기'라는 행위 자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은 오프닝부터 관객에게 말하듯 선언합니다. “이건 영화입니다.” 화면 전체를 물들이는 강렬한 퍼플 톤, 격렬한 지루박 춤을 추는 젊은 커플들의 실루엣, 그리고 그 사이사이를 교차하며 삽입되는 밝게 웃는 여자와 노부부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그 웃는 여자는 이 영화, 무의식의 주체인 '다이앤'입니다.
오프닝 음악이 끝난 후에는, 마치 잠이 든 사람의 무의식 속으로 침잠하듯, 침대 위를 스치는 어두운 이불의 그림자와 함께 깊은 숨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렇게 영화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사라진 듯한 ‘길 위’에서 시작됩니다.
영화<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단순한 이야기 전달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다이엔의 무의식은 영화의 형식적 실험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으며, 특히 서사 구조의 전복, 시간의 혼란, 인물의 분열을 통해 표현됩니다. 영화의 전반부는 다이엔이 꿈꾸는 이상화된 자아의 세계입니다. 그 안에서 ‘베티’는 순수하고 능력 있는 배우이며, ‘리타’는 사고로 기억을 잃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미스터리한 여성입니다. 이 관계는 현실의 다이엔이 이루지 못한 욕망—사랑, 인정, 성공—을 무의식 속에서 보상적 환상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선명한 색감, 음악, 고전적 플롯은 이 이상화된 세계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중반 이후, 블루 박스를 여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전복됩니다. 인물의 이름과 배역이 바뀌고, 동일한 배우가 다른 정체성으로 등장하며, 사건의 인과관계는 흐트러지고 시간은 뒤섞입니다. 이 혼란은 다이엔의 무의식이 현실의 충격 앞에서 붕괴되는 과정을 형식적으로 구현한 것입니다. 플롯의 단절, 감정선의 부재, 인물의 무표정한 시선 등은 그녀가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심리적 상태를 반영합니다.
실비아 극장 장면은 다이엔의 무의식 구조를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이건 다 녹음된 거야. 아무것도 진짜가 아니야.”라는 대사는, 무의식 속에서도 더 이상 현실 도피적 환상을 유지할 수 없게 된 다이엔의 절망을 함축합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다이엔이 자기 무의식의 진실을 마주하는 일종의 ‘상연된 자각’입니다. 영화 후반부의 흐트러진 시퀀스, 감정선의 붕괴, 꿈과 현실의 경계 해체는 결국 다이엔이라는 인물의 무의식이 자기 보존에 실패한 결과입니다. 그녀의 자아는 더 이상 이상화를 유지할 수 없고, 현실을 견딜 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영화는 다이엔의 자살로 끝을 맺습니다. 이 결말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무의식이 더 이상 억압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일어나는 심리적 붕괴의 은유입니다.<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이야기로 다이엔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이엔의 무의식은 그녀의 환상과 감정, 욕망과 공포가 겹겹이 쌓인 이미지와 구조로 형상화됩니다. 이 영화는 그녀의 무의식을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무의식 안에서 관객이 길을 잃게 만듦으로써 오히려 더 깊은 감정의 실체에 다가가게 합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끝없이 재감상하게 되는 '꿈'과 같은 체험으로 남습니다.
무의식의 세계 '사람 풍경' 그리고 영화
오랫동안 읽어온 김형경 작가의 『사람풍경』 첫 장에는 무의식에 대한 풍경의 느낌을 묘사한 인상적인 문단이 있습니다. 고대 고마의 지하 묘지인 카타콤 내부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공간은 좁고, 어둡고, 스산하며, 끝없는 지하 통로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통로는 폭 1미터, 높이 2.3미터 정도로 매우 협소하며, 관람객을 위한 코스에만 희미하게 조명이 설치되어 있어 나머지 공간은 암흑처럼 어둡다고 합니다. 시신을 안치하는 공간은 벽에 가로로 긴 직사각형의 벽장처럼 움푹 파여진 구조로 되어 있으며, 그 안에 시신을 넣었다고 합니다. 흐릿한 조명 아래 보이는 땅은 핏빛이 스민 듯 검붉게 보였고, 흙의 재질은 찰흙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점성이 강해 보였다고 합니다. 관람을 마친 후, 입구와는 다른 쪽 출구로 나와 지상의 푸른 초원을 마주하는 순간, 작가는 카타콤을 보기 전 상상했던 삶과 죽음, 박해와 저항, 불안과 평화의 이미지가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의 차이가 바로 그만큼의 거리라는 것을 확연히 느꼈다고 말합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데이비드 린치, 2001)를 여러 차례 감상하고 분석해 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이 책뿐입니다. 제 무의식 속에서 어떤 방어기제가 작동했으리라고 유추해 봅니다. 아니면, 감독의 의도가 제대로 작동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처음에는 "그래도 영화니까 그럴 수 있지" 하고 넘겼습니다. 하지만 전반부와 후반부의 내 용을 서사적으로 분석해보려 하니, 어떻게 맞추려 해도 조각들이 맞지 않았습니다. 무의식의 세계가 원래 그런 것 아니냐는 위안의 말이 무심결에 새어나왔습니다. (그것이 제 무의식의 반응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의식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접근 방식이 다릅니다. 프로이트 학파와 융 학파는 특히 그 정의와 구조를 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프로이트는 자아의식이 먼저 존재하고, 그것이 억압됨으로써 무의식이 생성된다고 보았습니다. 생존에 위협이 되거나,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욕망, 충동, 감정 등이 억압되어 의식의 아래로 밀려나 무의식이라는 창고에 저장된다는 입장입니다. 말하자면 무의식은 ‘떨어져 나온 자아의 파편’이자 ‘불쾌한 부산물’입니다.
반면 융은 무의식을 보다 긍정적이고 근원적인 차원에서 바라봅니다. 무의식은 인격 형성의 모태이며, 인간은 태초부터 넓고 깊은 무의식의 바다 속에서 조금씩 의식의 영역을 넓혀 간다고 봅니다. 융에게 있어 의식은 무의식의 일부이며, 자아는 그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에 가깝습니다. 대신 융은 억압되어 의식 아래로 내려간 무의식의 구성 요소를 더 섬세하게 분류하여 ‘그림자’, ‘아니마/아니무스’, ‘콤플렉스’ 같은 개념으로 명명하였습니다.
이처럼 용어는 달라도 공통적으로 말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한 개인의 내면에는 자율적이고 이질적인 또 하나의 세계, 곧 무의식이 존재하며, 그것이 오히려 삶의 비밀과 방향성을 더 많이 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의식은 생의 그림자이자, 보물 창고이며,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진실의 심층입니다. 책 속의 카타콤 묘사처럼, 어둡고 눅눅한 지하의 세계 속에서 그 실체가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그런 무의식의 세계를 스크린 위에 펼쳐 보입니다. ‘다이엔’의 무의식은 꿈, 환상, 현실이 뒤섞여 있어 보통의 이야기 구조로는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장면은 연속적이기보다 단절되어 있고, 인물의 정체는 시간에 따라 바뀌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희미합니다. 처음에는 당혹스럽고 어지럽습니다. 그러나 그 어지러움이야말로 무의식의 본질에 닿아 있는 느낌을 줍니다.
칼 융의 자서전 『기억, 꿈, 사상』을 처음 읽을 때의 혼란과도 유사합니다. 책의 도입부는 그의 유년 시절 꿈과 환상에 대한 서술로 시작되며, 어떤 문장은 꿈인가 싶으면 곧 환상이고, 현실인가 싶으면 다시 꿈입니다. 정신분석학자의 자서전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이야기와 이미지가 얽혀 있습니다. 그때 제가 경험한 독서의 혼란이,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보는 동안 반복되었습니다.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영화니까 그럴 수 있겠지, 하고 넘겼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본 날 영화 수업에서 교수님께서 이 작품이 자기반영성 영화이며, 무의식의 구조를 스크린으로 구현한 영화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비로소 “아하!” 하고 무릎을 쳤습니다. 영화의 불친절함은 곧 무의식의 복잡성, 그 자체였습니다.
김형경 작가의 『사람풍경』에는 작가가 꾸었던 인상적인 꿈이 소개됩니다. 외출 준비로 어수선한 가족들 사이에서, 한 아기가 혼자 양말을 신으려 애쓰고 있는 장면입니다. 꿈속에서 그는 그 아기에게 다가가 양말을 신겨 주었고, 그 순간 내면의 상처 입은 아이를 알아보고 돌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나서 저 역시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는 어떤 감정의 실체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무의식을 산다는 말의 의미가 조금 더 선명해졌습니다. 꿈속 아기의 모습은 곧,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삶의 태도이자, 고착된 상처의 풍경입니다. 이 깨달음은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다시 보며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전반부에서 ‘다이엔’은 사고로 기억을 잃은 ‘리타’를 도와주는 인물로 등장하지만, 여러 번 장면을 되돌려 본 끝에 리타의 혼란과 두려움은 바로 다이엔의 내면에서 억눌리고 분리된 감정의 조각들이었습니다. 영화는 다이엔의 무의식을 따라 구성된 환상의 연출입니다. 꿈속에서 다이엔은 이상화된 자아를 구축하지만, 후반부에서 그녀는 꿈에서 깨어 현실의 무력한 자아로 무너져 내립니다. 환상은 꺼지고, 억압된 감정은 고스란히 다이엔을 집어삼킵니다. 결국 영화는 무의식의 시퀀스를 하나하나 되짚으며 감정의 실체에 접근하고, 마지막엔 다이엔의 무의식이 스스로를 붕괴시키는 형식으로 끝을 맺습니다. 영화가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다이엔을 제거했다는 이 역설적인 결말 속에서, 저는 상처 입은 아기와 붕괴된 다이엔, 그리고 현재의 나 사이에 흐르는 조용한 공명을 느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인성은 세 살까지 기본 틀이 형성되며, 여섯 살까지 관계 맺는 방식이 거의 완성된다고 말합니다. 정신분석학자 제임스 F. 매스터슨은 『참자기』라는 저서에서, 누구에게나 생후 첫 3년 동안의 상처가 존재하며, 성인이 된 이후의 창조성, 친밀감, 자율성에 작고 미묘한 문제를 일으킨다고 설명합니다. 이 말은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결코 단순한 옛말이 아님을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 속 ‘다이엔’의 꿈, 환상, 현실의 시퀀스를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배우로 성공하고자 했던 다이엔은 동료인 카밀라 로즈와의 경쟁에서 밀려 좌절하며, 현실 속 인간관계에서도 친밀감의 문제가 드러납니다. 다이엔의 이모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인지, 카밀라 로즈가 그녀의 환상이 빚어낸 인물인지는 확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명확한 것은, 다이엔의 현실과 꿈, 환상 속에서 억압된 감정이 충돌하고 있으며, 그 결과 자아는 균형을 잃고 무너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심리학에서 자아, 즉 에고는 상처 입은 원초적 자아인 ‘이드(id)’와 이상화된 도덕적 자아인 ‘초자아(super ego)’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건강한 상태로 기능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영화 속 다이엔은 이 균형을 잃고, 무의식에 잠식당한 채 붕괴합니다. 그러므로 ‘무의식을 산다’는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자기도 모르게 끌려가고 있는 내면의 리듬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 겪는 대표적인 문제는 사랑과 성, 돈과 현실적 삶, 그리고 생을 유연하고 즐겁게 받아들이는 ‘놀이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돌이켜보면, 이 세 가지는 생의 전반에 걸쳐 가장 중요한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김형경 작가는 『사람풍경』에서 이 점을 여러 내담자의 사례를 통해 섬세하게 짚어냅니다.
이러한 시선으로 다시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돌아보았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분석이 불필요한 작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 찾아오는 당혹감을 해소하고자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열 번도 넘게 장면을 되돌려 보았지만, 처음 보았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혼란만이 남았습니다. 그러면서 제 영화 에세이 글쓰기를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치유와 성장을 기준으로 영화를 선택했고, 글쓰기를 배우면서 그것을 독자와 나누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그렇게 확장되어 가던 즈음, 이 영화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다이엔이라는 인물의 에고가 죽는 장면으로 막을 내립니다. 영화를 보며, 마치 저 또한 그 죽음에 함께 끌려간 듯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감독의 의도는 실패였을까요? 아니면, 제게 한 걸음 더 나아갈 용기를 묻고 있었던 것일까요? 저는 이 글쓰기를 통해 독자와 함께 치유와 성장을 지향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제 자신에게도 그 한 걸음을 허락해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의 해체 _ 감정이입을 거부하는 장치들
영화평론 글쓰기 수업에서 선생님께서는 글쓰기를 통해 성장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 주십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 제안이 크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글쓰기를 통해 책을 내고 싶다는 열망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도 이제는 거의 없습니다. 저는 그저 한 인간으로 태어나 성장했고,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입었으며, 다행히도 치유의 여정을 함께 걸을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긴 시간 끝에, 마음속에 가득하던 욕망의 불꽃이 서서히 사그라졌습니다. 내면 아이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웅크리고 울고 있던 내 안의 아이를 직면하고, 조용히 안아주는 행위가 곧 성장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우울함을 완화하고 감정을 정리해 주는 특별한 매개가 되었습니다. 영화는 나를 감정에 휩쓸리게 하기보다는, 타자의 감정을 분리해 관찰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영화가, “이건 가짜다”라고 스스로를 폭로하며 전면에 나섭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영화가 지닌 환영의 효과를 의도적으로 파괴합니다. 허구의 이야기에 감정 이입하여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며, 관객이 서사에 몰입하는 과정을 방해합니다. 이것을 브레히트는 ‘소격 효과’라 불렀으며, 낯설게 만들기를 통해 거리두기를 유도하는 기법입니다. 영화 초반, ‘꿈 같은 할리우드 환상 서사’는 고전적 내러티브의 형태를 띤 채 관객을 유인하다가, 중반 이후 인물·이름·배역의 급작스러운 전환으로 몰입을 방해합니다. 동일한 배우가 전혀 다른 정체성을 수행하며 관객은 혼란과 심리적 거리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실비아 극장의 장면에서 “이건 다 녹음된 거야, 아무것도 진짜가 아니야”라는 대사는 ‘제4의 벽’을 붕괴시키며, 영화가 스스로의 허구성을 드러냅니다. 후반부에 이르면 꿈과 현실의 경계는 무너지며, 플롯은 비선형적으로 전개되고 시간과 공간은 뒤섞여 관객의 안정감을 무너뜨립니다. 정지된 표정, 무표정한 인물들, 비일상적 이미지의 돌출은 감정 이입을 차단하고 심리적 충격을 유도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초현실주의 영화의 전통을 잇는 것이기도 합니다. 루이스 부뉴엘과 살바도르 달리는 영화는 곧 ‘꿈’이라 보았고, 『안달루시아의 개』(1929)는 대표적인 자기반영성 영화입니다. 『나이트메어』, 『겟아웃』, 『인셉션』, 그리고 『멀홀랜드 드라이브』 역시 무의식, 꿈, 욕망을 시각화하는 영화로 그 계보에 놓일 수 있습니다.
영화는 꿈과 마찬가지로 무의식과 욕망을 가시화하는 매체이며, 정신분석학은 그 기제와 효과, 이미지와 감정의 관계를 해석하는 중요한 틀을 제공합니다. 메츠는 극장에서의 관람 행위를 ‘자궁으로의 퇴행’에 비유했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해 영화를 분석했습니다. 이 접근은 이후 페미니즘 이론가들에 의해 남성 중심적 한계로 비판받았지만, 재현의 정치학, 젠더와 권력, 이미지의 이데올로기적 기능 등을 논의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현대 영화 이론은 관객을 수동적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인지주의 영화이론은 관객이 능동적으로 의미를 구성해나가는 주체라는 점을 강조하며, 보다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분석을 시도합니다. 관객은 더 이상 ‘영화에 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세계와의 긴장 속에서 의미를 선택적으로 생산하는 존재입니다.
모더니즘 영화가 예술성과 자아 탐구에 집중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 영화는 경계 해체와 유희, 혼종성 속에서 감각적 이미지의 유동성을 추구합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이러한 포스트모던 미학의 정수에 서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와 본질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며,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반복과 조합, 유희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생산합니다. 『보 이즈 어 프레이드』(2023)와 같은 영화는 이 흐름 속에서 관객의 자아가 조현적 소비 사회 속에 방치될 것인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체로 자리할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영화 수업의 과제로 보게 된 작품입니다. 수업 시간에 “이 영화는 자기반영성의 영화다”라는 문장을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분명하게 느낀 것은, 지금까지 제가 영화를 감상해왔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접근을 요구하는 영화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불현듯, 간화선을 설법하시던 교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영화를 분석하지 말라는 뜻인가? 그렇다면 이 영화는 왜 보아야 하는가? 수많은 질문들이 뒤엉킨 채, 영화는 제게 해석이라는 숙제를 남깁니다.
참고로, 자기반영성 영화로는 『스크림』(1996), 『트루먼 쇼』(1998), 『그랜드 투어』, 『언더 더 스킨』, 『파벨만스』, 『라라랜드』, 『애스터로이드 시티』 등이 있습니다. 그 중 『라라랜드』는 구입 후 한 번 감상하고 수년이 지난 지금도 다시 꺼내 보지 않았습니다. 어쩐지 그때 몰입이 되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오늘 밤은 그 영화와 다시 춤을 출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해석 이후의 공간, 다시 영화와 함께 걷기 위해
자기 반영성 영화는 영화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화 자체가 뭔지를 스스로 되묻는 영화입니다. 마치 배우가 무대에서 연기하다가 갑자기 관객을 바라보며 "지금 우리가 하는 건 연극이에요"라고 말하듯 영화도 스스로 영화임을 말합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실비아 극장에서 이를 말합니다. 극장에서 연기하거나 노래하는 모든 음성들이 녹음된거라고 하는데도 영화 속 두 캐릭터는 감정이입을 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이 장면은 자기 반영성 영화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영화는 더 이상 이야기나 환상이 아니라 영화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하나의 사고 실험이 됩니다. 감정에 몰입하는 순간 영화는 멈추게 하고 "이건 영화야"라고 말합니다. 관객은 이 말을 듣고도 여전히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 눈물조차도 영화가 이끌어낸 것임을 자각하며 낯선 자신을 바라보게 될까요. 자기 반영성 영화는 바로 그런 영화입니다. 스스로를 드러내며 우리가 감상하는 방식 자체를 흔드는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낯섦을 통해 우리가 어떤 감정에 반응하고 어떤 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지금 당신이 느낀 감정은 누구의 것이었습니까?
'일상이 행복'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 후반전 _ 시레토코 고가나무길 산책 (2) | 2025.06.01 |
---|---|
[쓰기의 미래](나오미 배런) _ 독서 토론 (4) | 2025.06.01 |
<헤어질 결심>(2023.박찬욱) (3) | 2025.05.31 |
<박쥐>(2009.박찬욱) (3) | 2025.05.30 |
<미드소마>(2019.아리 애스터) (0) | 2025.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