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펼쳐진 푸른 들판 위로 햇살이 쏟아지고, 눈부신 백야 아래 꽃들이 바람에 일렁이는 호르가 마을 에 들어서는 대니 일행은 마치 꿈처럼 밝고 평화로운 풍경 속을 천처히 지나 천사같은 옷차림의 사람들이 웃으며 맞이합니다.
점프 스케어 없는 공포 영화
관객이 공포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영화가 가진 익숙한 표현 방식이나 설정을 어느 정도 즐기거나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를 '클리셰'라고 하는데 클리셰는 단순히 진부하다는 뜻으로만 이해되기보다는 오랫동안 영화에서 반복되어 온 하나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클리셰는 장르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어두운 조명, 갑작스러운 소리, 정체 불명의 존재 등은 공포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요소입니다. 하지만 영화 전문가들에 따르면, 장르라는 것은 일정한 규칙이나 형식에 딱 맞춰 고정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시대와 관객의 기대에 따라 계속 변해가기 때문에 장르의 경계는 유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포 영화에서 어둠은 모든 정보를 숨기고, 우리의 감각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은 아무것도 방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밤은 인간의 불안과 공포를 자극하는 완벽한 무대가 됩니다. 점프 스케어(갑툭튀) 역시 이 어둠 속에서 극대화됩니다.
영화<미드소마>는 우리가 익숙하게 여기는 어둠을 보이지 않습니다. 대니의 악몽 장면을 제외하면 이야기의 대부분은 스웨덴의 한 여름 백야 아래에서 펼쳐집니다. 눈이 시릴만큼 환한 햇살 아레에서 벌어지는 공포. 처음 보는 순간 마치 휴양지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착각이 들 정도로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영화의 오프닝은 대니의 꿈으로부터 펼쳐집니다. 벽에 걸린 그림 속 눈 내리는 헬싱글란드의 밤 풍경 위로 음악이 흐르다가 불현듯 전화벨 소리와 함께 대니의 가족이 사는 집으로 장면이 '툭' 전환됩니다. 우리가 익숙한 공포의 밤을 예고하고는 영화는 이후 백야의 태양 아래에서 서서히 무너지는 감정과 관계의 공포를 보여줍니다.
처음 보는 낯섦
영화<미드소마>(아리 애스터.2019)는 호러 장르에 속하는 공포 영화입니다. 영화수업에서 장르 개념을 설명하시다가 소개한 이 영화는 점프 스퀘어(jump scar.갑툭튀)가 없는 공포 영화라고 합니다. 영화를 치유를 목적으로 주로 감상하는 나에게는 무척 낯선 영화 언어들이 귀 속을 들락달락 거렸습니다. 선생님은 공포영화를 감상할 때 긴장하여 불편해지는 저와는 달리 스트레스가 해소된다고 하셨습니다. 현실과 달리 공포 영화엔 적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어 신경 쓸 일도 없다는 것과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전문가의 시선이 경이롭게 느껴졌습니다. 점점 이 영화가 흥미로워집니다.
밝은 백야의 '호르가' 마을에서 벌어지는 공동체 의식에 참여한 뉴욕 출신의 대니와 그녀의 친구들이 겪는 공포가 참으로 낯설게 느껴집니다. 영화의 미장센은 힐링 영화를 연상하게 하는 환한 색채로 이룬 대낮의 태양, 하얀 옷차림, 꽃,축제등의 요소가 가득합니다. 영화는 주인공 '대니'의 심리 치유를 다루는 것처럼 영화 초반에 동생의 죽음이 등장하고 불안한 그녀와 친구들이 떠나 온 여행에는 치유인지, 공포인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영화의 모티브를 '치유인가, 공포인가' 놓고 감상하면 호르가 마을 사람들이 민속호러의 적대자들처럼 이방인들을 극악무도하게 살인했음에도 '대니'는 웃는다. 그녀는 그 마을 사람들과 동화된 것인지, 불안을 치유하게 된 것인지.
대니의 애도되지 못한 상실감을 공동체의 극단적인 공감을 통해 그곳의 일원이 되어가는 여정은 섬뜩합니다. 치유 성장 드라마 장르의 영화와 확연이 다른 느낌 이 영화는 호러물이 맞습니다. 대니는 상처받는 인물입니다만 그녀의 치유엔 관계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대니의 핵심 감정은 불안입니다. 그리고 영화의 치유같은 공포를 일으키는 감정은 공감입니다. 영화의 감정은 분노의 다른 이름 공포입니다. 이 영화를 연출한 아리 애스터는 1986년생으로 젊은 감독입니다. 미국 영화 예술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가족 내부의 금기를 시적이면서도 파괴적인 감수성으로 다뤄 화제를 모은 인물입니다. 그의 대표작 <Hereditary>(유전.2018), <Beau is Afraid>(2023)는 코미디와 오이디푸스 신화를 뒤섞은 세 시간짜리 대서사로, 트라우마와 자아 탐색을 시각적으로 실험한 영화입니다. 그는 장를르 비틀면서 인간 심리의 깊은 어둠을 응시하는 감독입니다. 그에게 있어 공포의 도구는 귀신이 아니라, 애도되지 못한 감정, 외면한 고통, 공동체로부터의 소외입니다.
영화 <미드소마> 줄거리 요약
대니는 가족을 모두 잃은 극심한 상실 속에서 고통받는 젊은 여성입니다. 그녀의 남자친구 크리스티안은 감정적으로 무딘 사람으로, 대니의 고통을 제대로 돌보지 않습니다. 그 관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무너지고 있었지만, 대니는 홀로 남겨지는 두려움 때문에 그를 붙잡고 있습니다.
어느 날 크리스티안과 그의 친구들은 스웨덴의 한 시골 마을 ‘호르가’에서 열리는 여름 축제에 참가하기로 하고, 대니 역시 동행하게 됩니다. 그들이 도착한 호르가는 백야, 즉 밤이 오지 않는 한여름의 대낮 속에 있습니다. 자연은 찬란하고 경치는 목가적이며, 사람들은 하얀 옷을 입고 꽃을 머리에 얹고 노래하고 춤춥니다. 이 마을은 처음엔 마치 힐링 여행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곧 서서히 뒤틀립니다. 축제는 단순한 민속 행사가 아닌 의례와 제물, 순환과 희생의 의식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방문한 외부인들은 점차 하나씩 사라져 갑니다. 이방인인 이들은 공동체의 규칙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대가로 죽음을 맞습니다.
크리스티안은 마을의 젊은 여성과 강제적인 성관계를 맺는 의식에 끌려들어가고, 대니는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때 대니는 자신의 내면이 완전히 붕괴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제 그녀는 어느 누구에게도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크리스티안은 이미 오래전부터 대니를 외롭게 만든 사람입니다.
결국, 축제의 마지막 의식이 시작되고, 대니는 제물로 누구를 바칠지 선택할 권리를 부여받습니다. 그녀는 그 제물로 크리스티안을 선택합니다. 불 붙은 곰 가면 속에 갇힌 채 비명을 지르지 못하고 죽어가는 크리스티안을 바라보며, 대니는 처음으로 환하게 웃습니다. 햇빛은 찬란하게 내리쬐고, 사람들은 함께 감정을 공유하며 울고 웃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 '불안'
영화 속에서 대니의 감정을 무엇으로 느끼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영화적 표현이나 이론을 모르는 관객으로서는 무의식을 거울처럼 비춰 보거나, 심리학 또는 정신분석을 기반으로 영화를 분석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불안감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뿌리가 깊습니다. 애착 대상인 엄마를 상실하거나 엄마를 잃을 위험한 상황이 오면 아기는 울음을 터뜨립니다. 위험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위험에 대한 막연한 생각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무력해지는 상태가 불안입니다. 감정은 몸의 반응이지만 트라우마가 되면 생각만으로 몸의 반응을 일으켜 불안하다고 느낍니다. 영화 속 전통적인 민속 마을 '호르가' 는 현대를 살아가는 대니의 신경증적 불안을 치유합니다.
전통적 공포영화는 밤과 밀실같은 클리셰를 사용하여 소통이 단절되고 도망칠 수 없는 닫힌 공간으로 불안감과 위기감을 조성합니다. <미드소마>는 이 클리셰를 전복하고 낮에 공포가 벌어지고 밝음 속에서 오히려 더 큰 불안을 야기합니다. 관객은 대니가 겪는 심리적 이질감에 몰입하게 되어 도시의 차가운 밤과 달리 한낮의 목가적 풍경 속에서 공포가 더 선명하게 드러남을 목격합니다. 결국, 대니는 공포의 한 가운데서도 환하게 웃는데 이 영화의 섬뜩한 지점입니다.
전통적인 공포의 밤 대신 낮의 공포를 통해 관객에게 심리적 불안을 유도합니다. 관객은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아리 애스터가 말하고자 하는 감정의 전복입니다.
관객은 낮이기 때문에 안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환한 태양 아래에서 너무 끔찍한 일이 벌어지니까, 익숙한 감정의 기준이 무너집니다. 크리스티안이 절규할 때 대니는 구하지 않습니다.오히려 해방감을 느끼며 웃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익숙한 '치유'와 다른 아주 낯선 결말입니다. 크리스티안에게 대한 복수가 아니라 자신을 지우고 있던 관계로부터의 해방감으로 읽히는 건 크리스티안은 영화 내내 대니를 방치합니다. 그녀의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고 회피했고 친구들과 함께 하는 여행도 원래는 대니를 제외하고 가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공동체에서 다른 여성과 의식적인 성행위를 하게 되는 장면은 대니가 정서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었음을 상징합니다. 대니는 결국, 자신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존재들을 만납니다. 비록 극단적이긴 하지만 호르가 공동체는 대니를 감정적으로 완전히 끌어안고, 공감과 일체화려는 방식으로 그녀를 회복시키려 합니다. 이 과정은 어떤 의미에서는 세뇌에 가깝지만, 대니에게는 처음으로 감정이 수용되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공동체의 시선으로 보면 크리스티안은 그 공동체의 규칙을 어기고, 욕망과 무관심으로 대니를 더욱 고립시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에 응당한 대가를 치른 것처럼 묘사됩니다. 대니의 감정으로 보면 크리스티안에게 복수한게 맞지만 심리적 여정으로 보면 상실과 고통을 거쳐, 정체성을 다시 찾는 과정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공포영화 문법으로 보면 가해자/피해자 구도를 전복시키는 아주 독특한 방식입니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내 감정을 공감해주는 공동체가 있다면, 나는 나를 버리고 그곳에 속하겠는가?"
"내가 웃고 있는 지금, 그 웃음은 정말 나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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