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사찰 시퀀스, 안개 낀 이포의 바다, 외로운 서래를 감시하듯 응시하는 망원경 영화는 느와루의 전형적인 클리셰를 전복한 껍질만을 차용한 채 존재론적 사랑의 깊이로 들어갑니다.
창이 닫혔다고 태양이 사라진 건 아니다
누군가가 당신의 삶에서 떠났다고 해서 사랑이 사라진 건 아닙니다. 진짜 사랑은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나 이야기 속에만 속한 것은 아니죠. 우리는 사랑 그 자체입니다. 경계 없고, 집착하지 않으며, 자유로운 존재, 잃어버림 속에서도 사랑은 여전히 여기에 있습니다. 조용히, 넓게 다시 느껴지기를 기다리며 _혜민스님
영화<헤어질 결심>은 사랑의 본질 즉 사랑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랑을 깊이 되새기게 합니다.
오르페우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이자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태양신 아폴론, 어머니 무사(뮤즈)중 한 명인 칼리오페라고도 전해집니다. 오르페우스는 리랄르 연주할 때면 사람뿐 아니라 짐승, 나무 돌마저도 그의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고 합니다.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가 사랑한 아름다운 님프(인간여인)입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되지만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극이 찾아 옵니다.어느 날, 에우리디케는 숲 속을 걷다가 뱀에 물려 갑작스럽게 죽게 됩니다. 그녀의 영혼은 하데스의 지하 세계로 내려가고, 오르페우스는 깊은 슬픔에 잠깁니다. 그는 그녀를 되찾기 위해 리라를 들고 죽음의 세계로 향합니다. 오르페우스는 명계의 입구를 지나 죽은 자들의 강인 스틱스를 건너고 명계의 문을 지키는 세 머리 개 케르베로스조차 그의 음악 앞에 길을 열어 줍니다. 지하 세계의 신 하데스와 그의 아내 페르세포네 앞에서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사랑과 슬픔을 노래합니다. 그의 연주는 지하 세계조차 울리게 만들며, 영혼들도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결국 하데스는 감동하여 조건부로 에우리디케를 데려가게 허락합니다. 하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에우리디케와 함께 지상을 향해 갈 수 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 지상에 도달할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 그녀를 보아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영원히 명계에 남아야 할 것이다." 오르페우스는 승낙하고 에우리디케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 지상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들이 너무 조용하고 그녀의 발소리조차 느껴지지 않았기에 오르페우스는 점점 의심과 두려움에 빠집니다. 지상의 빛이 가까워지는 찰나,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그녀가 정말 따라오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뒤를 돌아봅니다. 그 순간 에우리디케는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에우리디케는 다시 지하 세계로 돌아가고, 이번엔 어떤 신도, 어떤 음악도 그녀를 돌려 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후 오르페우스는 다시는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다른 여인들과 사랑을 나누지 않았고 오직 에우리디케를 그리워하며 떠돌다가 끝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렇게 그의 리라는 하늘의 별자리가 되어 지금도 하늘에서 빛나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향한 깊은 사랑을 가졌지만 끝내 신의 조건을 지키지 못하고 그녀를 잃습니다. 사랑이란 신념과 기다림이 필요한 것이고 사랑을 위해 신의 세계에 도달했지만 자신의 불안과 의심으로 그 사랑을 무너뜨리는 인간의 한계를 상징하는 신화입니다.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은 사랑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사랑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감정은 겉으로 드러나기보다 응시와 침묵 속에 가라앉고 , 관계는 선명한 언어 대신 흔들리는 눈빛과 놓아버린 손끝에서 말없이 흐릅니다. 해준과 서래의 어긋난 사랑을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내면을 통과하는지 느끼게 됩니다. 해준의 사랑은 칼융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무의식 속 아니마로 나타납니다. 그가 서래에게 느끼는 끌림은 이성적 판단과 윤리를 초월하여 무의식의 여성성의 이미지에 촉발된 감정입니다. 그는 감시에서 응시로 넘어가는 동안 자기 내부의 심연을 향해 스스로 붕괴합니다. 그의 사랑은 내면의 균열에서 피어났고 결국 자신을 무너뜨립니다. 반면 서래의 사랑은 플라톤의 이데아에 가깝습니다. 그녀에게 사랑은감정의 교환이 아니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본질의 응시이며, 손에 닿지 않는 어떤 진실을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서래는 직접적으로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이란 단어가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그것은 사라진다고 믿는 듯, 그녀의 사랑은 말보다 행동으로 머물기보다 떠남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사랑은 구체적인 대상 너머를 향한 이상적 실재, 곧 이데아로 존재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사랑은 마침내 서로를 스치되, 완전히 머물지 못하게 합니다. 해준은 자신의 무의식과 사랑을 혼동하고, 서래는 사랑 자체를 실현 가능하지 않은 형이상학적 실재로 경험합니다. 바로 이 어긋남이 헤어질 결심의 깊은 슬픔을 남기게 됩니다.
사랑을 똑바로 보려는 해준과 사랑을 잘 보는 서래
해준과 서래는 형사와 피의자로 만났지만 취조실에서의 둘은 오래 된 연인 같은 분위기입니다. 사망자의 동선을 따라 절벽을 오르며 몸으로 진실에 다가가는 해준처럼 서래는 사건을 말로 듣기보다 사진을 통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한국어가 서툰 서래에게 해준은 문장을 풀어 쉽게 설명하려 노력하고 그걸 보는 서래는 그 설명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사전을 찾아본다. 그들은 삶의 태도와 언어를 조율하고 있었습니다. 자부심과 꼿꼿함은 해준과 서래의 닮은 삶의 태도입니다. 해준이 말하는 똑바로 본다는 말은 단지 수사의 태도가 아니라 삶의 윤리에 가깝고 명확한 시선으로 들여다보기 위해 수시로 안약을 넣으며 눈을 맑게 유지합니다.
"산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 봐."
보통 이런 경우 '마침내'라는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남편이 등산을 하다가 떨어져 죽었는데 마침내라는 말은 죽음이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해준은 이 지점에서 그녀에게 끌리는 기운이 서서히 일어나게 됩니다. 원칙적이고 품위 있는 형사로서의 해준은 대상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서래와의 거리가 안갯 속처럼 흐려지는데 결정적 계기가 된 그녀의 언어의 미학입니다. 서래 언어의 부조리함 속에서 삶보다 더 선명한 정서를 감지하게 됩니다. 서래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해준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언어는 해준의 마음에 균열을 일으켰고 그 균열 속으로 사랑이라는 정념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해준의 3년 동안 미해결 사건 '질곡동 사망 사건'을 사랑을 잘 보는 서래의 도움으로 해결하게 됩니다.
"너 돈 때문에 사람 죽인 거 아니지?"
"한 달 감옥 있을 때 범이가 오가인 건드려서 그런 거잖아."
"나도 좋아하는 여자 있어. 그 남편이 그 여자를 때려. 난 그 새끼 죽이고 싶어서 미치겠어."
이 대사에서 해준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며 산오의 동기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산오는 오가인에게 "너를 만나 공허하지 않았다"라는 말을 전해 달라며 옥상에서 투신합니다. 해준의 대사에는 사건 해결을 넘은 정서의 자벡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을 자각한 사람, 사랑을 보호하지 못한 죄책감에 흔들리는 사람, 그리고 이미 죽은 자를 향해 분노하는 이의 혼잣말이었습니다. 기도수는 이미 사망햇지만, 해준은 분노합니다. 그것은 서래가 겪어온 고통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사랑의 통증입니다. 산오는 가인이 있어서 공허하지 않았다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지만 해준이 그토록 알고 싶었던 사랑이라는 감정의 기록을 눈 앞에서 보게 된 것입니다. 해준의 집에 찾아 온 서래는 종결된 사건들의 사진을 떼어주며 해준이 푹 잘 수 있도록 그의 공간을 정돈해주고 그 틈에서 조심스레 자신의 감정을 흘립니다. 서래를 향한 자기 감정의 실체를 인정했다는 해준의 대사는 홍산오를 이해했고 감정의 심연에 도달한 이의 조용한 고백입니다. 가인이 있어 공허하지 않았다는 산오의 대사는 곧 서래가 해준에게 했던 모든 침묵과 사랑을 평행으로 이룹니다. 드러내지 않은 사랑이 질곡동 사건의 대사를 통해 영화는 그 마음을 읽는 순간에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서래는 해준보다 훨씬 전에 사랑을 보고 있었습니다. 서래는 사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해준을 보고 있었고 그가 맴도는 궤적을 조용히 열어 주었습니다. 해준은 단서를 따라가며 사건을 해결하지만 진짜 해결된 것은 그가 처음으로 서래의 마음을 감지한 순간입니다. 서래는 해준보다 먼저 사랑을 보았고 그 사랑은 말로 고백되지 않지만 행동과 직감, 조용한 개입의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질곡동 사건은 그 사랑의 비밀스런 증거입니다. 해준의 집 미결사건 사진이 붙은 벽을 보는 서래는 질곡동 사건의 홍산오의 사랑을 단번에 보게 됩니다.
"감옥에 간 적이 있는데요?"
"네, 한달밖에 안 살았죠.지 여자가 딴 남자 만난다고 오해해서 그 남자를 때렸어요."
"죽음보다 감옥을 더 무서워하는데"
"그러게, 그런 놈이 감옥 갈걸 각오하고 사람을 때렸네"
"죽을만큼 좋아한 여자네"
서래의 대사와 산오를 쫓는 화면으로 점프 컷하면서 둘의 대사가 흐릅니다. 죽은 범이는 결혼도 했는데라는 해준의 말에 이어지는 서래의 말은 그녀의 사랑을 고백하듯 중첩됩니다.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는 걸 중단 합니까?"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은 은밀한 언어의 섬세한 영화입니다. 감정의 정수를 아주 잘 포착한 상징적인 표현으로 심리적 공명을 유도합니다.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 두 사람은 두려움에 대해서도 고백합니다. 해준은 피 냄새가 두렵다고 하고, 서래는 높은 곳이 두렵다고 말합니다. 사랑의 빛은 이렇게 두려움 틈에서 피어납니다.
경계 위에서 마침내 닿은 마음 _ 우리는 같은 종족
비 내리는 사찰 시퀀스는 멜로 드라마라는 영화의 정체성을 감정의 전환 속에서 암시합니다. 사건과 진술 너머 사랑이라는 감정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내러티브가 이 지점에서 드럽납니다.
사찰은 세속과의 경계, 침묵의 공간입니다. 대웅전에서 이어폰으로 해준의 녹음된 음성을 들으며 서래는 삶과 죽음, 윤리와 감정 사이, 경계 위에 선 존재처럼 앉아 있습니다. "우는구나,,, 마침내 " 서래는 녹음 된 파일을 지웁니다. 사랑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해준이 끝내 말하지 못한 채 사랑했음을, 서래는 말하지 않았기에 더 깊이 사랑했으므로 눈물을 흘립니다. 그녀가 해준의 마음에 도달하게 되었지만 이 사랑이 이데아와 아니마처럼 어긋날 수밖에 없었던 결말을 예고합니다.서래에게 사랑은 눈으로 보이는게 아닌 진정한 본질을 가리키는 자체이므로 뒷모습으로 말합니다. 본능적인 끌림을 혼란스러워 하는 해준은 아니마의 작동입니다. 아니마는 해준의 무의식 속 자신의 모습이고 서래는 거울입니다. 사찰에서 해준은 자신과의 마주침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박찬욱 감독의 전작 <박쥐>오프닝 신 하얀 배경의 아치형 문과 나무 그림자가 상징하는 동굴의 비유가 여전히 <헤어질 결심>의 서래를 통해 흐르고 있습니다. 이데아는 직접 볼 수 없는 진정한 본질을 가리키고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물들은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철학적 기조를 바탕으로 서래의 사랑이 그려집니다. 한편 해준의 아니마는 한마디로 남성 속의 여성입니다.
밖으로 강한 남자는 안으로 약한 여자다. 남자의 페르조나 뒤에 그대자인 아니마가 있다. 밖을 향해서만 자신을 보고 있기 때문에 자기 마음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무의식의 어둠 속에 싸여 있다. (이부영의 분석심리학 중에서)
존재의 본질과 무의식이 교차하는 지점, 현상과 본질, 의식과 무의식, 인식과 욕망의 중층적 만남입니다.
플라톤에게 있어 이데아는 감각적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참된 실재이고, 우리가 이 세계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은 이데아의 그림자, 모방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데아는 본질 그 자체이며 우리는 그 본질을 향한 에로스적 갈망을 통해 진리를 향해 나아갑니다. 사랑은 본질을 향한 기억의 움직임이고 사랑은 그리움으로 존재합니다.
칼 융에게 아니마는 남성의 무의식 속 여성적 이미지로, 타자(특히 이성)의 얼굴을 한 내면의 자아의 잃어버린 부분입니다. 실제 여성과의 관계를 통해 자기 안의 무의식과 마주하게 만드는 매개자입니다. 사랑은 내 안의 무의식이 타인을 통해 깨어나는 사건이고 사랑은 투사로 시작해 회복으로 향합니다. 두 개념의 철학적 접점은 사랑이 타인을 통해 본질에 이르려는 존재의 운동이라는 점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바깥에 있는 참된 실재이고, 융의 아니마는 내면 깊은 곳에 감춰진 무의식의 실재입니다. 이데아는 이성적 직관을 통해, 아니마는 해준의 감정적 투사를 통해 다가갑니다. 이데아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아니마는 보이는 것 속에 감춰진 본질과 무의식의 두 축입니다. 이 둘이 만난다는 것은 존재론과 심리학이 만나는 지점으로 사랑이라는 경험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넘어가는가를 묻는 철학적 교차점입니다. 서래는 해준에게 이데아처럼 다가옵니다. 말로 표현되지 않으며, 직접 닿을 수 없고 죽음의 방식으로 사라짐으로써 오히려 완전한 형상으로 남습니다. 반면 해준에게 서래는 무의식이 만들어낸 환영, 즉 아니마입니다. 그는 서래를 보며 끌리고, 혼란스러워하며 자기 안의 결핍과 무너짐을 직면하게 됩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사라을 지향성의 고도화로 이끌고 융의 아니마는 사랑을 내면의 진실과 마주하는 거울로 만듭니다. 이 두개념은 사랑은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존재의 구조를 건드리는 사건임을 증명합니다. 해준은 아니마의 분열 속에서 무너지고, 서래는 이데아로서 사랑을 은폐한 채 존재로 남는 영화속 구조는 철학적 뼈대가 있는 내러티브입니다. 엄연히 말해 같은 종족은 아닙니다.
서래의 거친 손에 핸드크림을 발라주는 숏은 인간적인 접촉이었지만 수사에 결정적인 단서가 되지만, 해준은 조심스럽고도 다정하게 그 손을 어루만집니다.
"처음부터 좋았습니다. 날 책임지는 형사가 품위 있어서요."
서래는 해준의 태도와 말투에서 품위를 보았습니다. 후에 해준은 이 품위가 자부심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서래씨는 내가 서래씨를 왜 좋아하는지 안 물어요?"
"서래씨가 나하고 같은 종족이라는 거, 진작에 알았어요."
"남편 사진 보자고 했을 때,,,, 말씀은 싫다고"
서래를 감시의 대상이 아닌, 이해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의 고백입니다. 처음으로 취약한 두려움을 드러내고 서로에게 조심스럽게 기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사찰의 처마 밑 비는 내리고 두 사람은 감정의 피난처에 들어와 있습니다. 법과 윤리, 현실과 규범으로부터 벗어난 장소였고 사랑은 그 침묵 속에서 말합니다.
비는 문학에서 종종 정화나 운명의 암시로 등장합니다. 사찰은 세속과의 경계이자 침묵의 공간입니다. 서래와 해준은 그 경계에서 수사와 유혹이라는 전형적인 관계를 벗어나, 내면의 진실을 바라보는 관계로 전환되는 시퀀스입니다.
"당신의 사랑이 끝난 그 순간, 나의 사랑이 시작되었어요."
해준은 서래 대신 할머니를 돌봄을 하면서 작은 단서를 발견한다. 무심코 그녀의 물건과 약봉지, 손톱깍이를 정리하다가 서래의 거칠었던 손이 떠오릅니다. 서래가 왔다면 월요일이라 답하는 할며니를 통해 루틴 속에 무언가 어긋난 시간의 조작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추리하게 됩니다. 이 장면은 시간 감각을 통해 범죄의 실마리를 내비치는 지점이고 해준이 사랑과 직감 사이에서 균열을 느끼기 시작하는 계기가 됩니다. 붕괴의 전조입니다.
마치 사랑을 이야기하듯 "한국 남자는 손이 참 부드럽죠?" 했던 서래의 대사와 남편 기도수를 산 정상에서 밀어버리는 숏으로 교차 편집됩니다. 이 순간 관객은 대사의 숨은 층위를 직감합니다. 부드러운 손은 단순히 물리적 촉감을 말하는게 아니라 그 손으로 누군가를 다정하게 안고, 동시에 잔인하게 떠미는 인간의 양면성을 말합니다. 이 대사와 편집은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교차를 드러냅니다. 손은 사랑의 도구일 수도 있고 죽음의 도구일 수도 있습니다.해준은 이 대사를 사랑의 언어로 들었지만, 관객은 동시에 살인의 시간을 함게 목격함으로써 사랑과 진실이 얼마나 쉽게 오염될 수 있는가를 체감합니다. 서래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여전히 해준의 내면을 가르고 있었고, 그가 보았던 손, 흔들리는 증언, 그리고 할머니의 시간 감각사랑이 아닌, 진실의 편에 선 형사로서의 직업윤리를 일깨웠습니다. 서래는 무혐의로 풀려난 날, 해준의 집을 찾습니다. 해준은 말합니다. "저는… 붕괴되었습니다. 그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서래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붕괴’**라는 단어를 검색합니다. "무너지고 깨어짐." 그녀는 비로소 해준이 감정적으로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 순간부터 서래의 사랑이 시작됩니다.해준이 무너진 자리에 그녀는 비로소 사랑을 놓습니다. 그 사랑은 말보다 조용하고, 눈물보다 깊었습니다.폰을 지니고, 바다를 기억하며, 서래는 이별이라는 감정을 자신의 방식으로 품기 시작합니다. 이 장면은 두 사람의 사랑이 서로 다른 지점에서 출발했고, 서로를 향해 걷고 있었지만 마침내 엇갈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음을 암시합니다. 한 사랑이 무너지는 순간, 다른 사랑은 시작되었습니다.
이포로 이사오게 된 서래와 아내와 함께 살게 된 해준이 마주하게 됩니다.이포에는 안개 낀 날씨가 많은 곳입니다. 안개는 모든 것을 흐릿하게 만듭니다. 진실도, 감정도 해준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서래의 기억이 흐릿해진 어느 날 서래의 두 번째 남편이 피살되었습니다. 또다시 용의자로 서래를 조사하게 된 해준은 사건의 실체만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의 실체 또한 함께 파헤쳐야 할 시간입니다. 안개 속 뿌연 이포만큼이나 은밀한 서래를 조사하게 되면서 서래와 해준의 감정은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호미산으로 향합니다.
"호미산은 내 산이예요." 비록 법적으로는 빼앗겼을지언정, 그녀의 기억과 상처의 뿌리는 여전히 그 산에 남아 있습니다. 서래의 내면 깊숙한 곳에 들어서는 통로 호미산은 고요함 속에서 천천히 그녀가 말하지 않았던 것들이 드러납니다. 호미산의 풍경은 이포의 안개와는 다릅니다. 바다는 흐리고 무너지는 장면이라면 호미산은 과거의 뿌리와 상처가 침묵처럼 쌓여 있는 공간입니다. 서래는 사랑을 표현하지만 해준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서래가 중국어로 말하고 번역기를 통해 해준의 마음을 읽어주자 해준은 "400일 동안 당신이,,,," 감정을 고백하면서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피의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라는 말로 또다시 붕괴되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입니다. 서래는 해준이 버리라고 했던 폰을 건네며 재수사를 하라고 합니다.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라는 마음을 전하는것입니다.
나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 그 언젠간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 완전 붕괴 됐어요. 할머니 폰 바꿔 드렸어요, 같은 기종으로 젼혀 모르고 계셔요.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
"당신 목소리, 날 사랑한다고 하는 ....."
해준은 폰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비로소 사랑이 떠난 자리에서 사랑의 실체를 만납니다. 바다를 거친 숲을 헤치듯 헤매는 해준은 그녀가 남긴 빛을 봅니다.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어요? 언제요?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은 끝났고, 당신으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나의 사랑은 시작됐어요. 해준씨 바다에서 건진 전화기 다시 버려요. 더 깊은 바다에 버려요."
"왜 자꾸 딴 소리만 해요? 아, 답답해요."
바다의 모래 무덤에 스스로 들어 가 앉은 서래는 눈으로 볼 수 없는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존재했던 사람입니다. 사랑은 해석되어야 하는 언어가 아니라, 문득 도달하는 실존적 깨달음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을 영화는 행위와 침묵, 공간과 시선으로 보여줍니다.
"창이 닫혔다고 해서 태양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당신의 삶에서 떠났다고 해서 사랑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서래는 사라졌고 해준은 사랑을 자각합니다. 텅 빈 자리에 비로소 사랑은 본래의 빛을 드러냅니다. 서래가 사랑 그 자체, 즉 존재론적 사랑의 이데아라면 해준은 그 사랑을 보려 애쓰지만 끝내 이해하지 못하고 엇갈리는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안약을 넣으며 똑바로 보려고 하지만 사랑은 결코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습니다. 서래는 사라진 자리에 사랑을 남깁니다. 말하지 않고도 전해졌고 말하는 순간 사라졌습니다. 해준은 사랑을 의심하고 해석하려 하고 경계하고 수사하려고 했습니다. 사랑은 어떤 방식으로도 해명되지 않는 실재였기에 그는 끝내 엇갈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해준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사랑을 말로 확인받고 싶어 하고, 논리와 윤리의 틀 안에서 정당화하려 하며 때로는 너무 늦게 깨닫고 사랑을 잃은 후에야 사랑을 비로소 알아차립니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향한 깊은 사랑을 가졌지만 끝내 신의 조건을 지키지 못하고 그녀를 잃습니다. 사랑이란 신념과 기다림이 필요한 것이고 사랑을 위해 신의 세계에 도달했지만 자신의 불안과 의심으로 그 사랑을 무너뜨리는 인간의 한계를 상징하는 오르페우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은 '안개'의 노래를 영화에 전반적으로 깔아 두고 사랑을 은폐합니다. 영화의 핵심을 음악적으로 번역한 바다를 헤매는 해준의 엔딩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퇴행합니다. 말하지 못한 진심, 전해지지 않는 고백, 해석되지 못한 사랑의 언어들 모두 안개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 은폐는 감정의 회피가 아니라 사랑의 본질을 보호하고 쉽게 소모되지 않도록 지켜내는 미장셴이자 윤리입니다.
'일상이 행복' 카테고리의 다른 글
[쓰기의 미래](나오미 배런) _ 독서 토론 (4) | 2025.06.01 |
---|---|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데이비드 린치) (3) | 2025.05.31 |
<박쥐>(2009.박찬욱) (3) | 2025.05.30 |
<미드소마>(2019.아리 애스터) (0) | 2025.05.30 |
<이니셰린의 밴시>(2011.마틴 맥도나) (2) | 2025.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