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쥐> 감당할 수 없는 무게
드디어 영화 『박쥐』를 십 년 만에 다시 보았습니다. 화요일 저녁 수업 직전에 공백 시간이 생겨 자연스럽게 영화를 틀게 되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영화 평론 글쓰기를 그만둘지, 계속할지 깊이 고민하였습니다. 마음에 번민이 들끓어 안갯속을 걷는 기분이었습니다.
십 년 전 감상했던 『박쥐』에 매몰되어 있던 나 자신을 어떻게 구출할 수 있을지 물었습니다. 억지로 애쓰진 않았지만, 시간은 흘렀고 그 사이에 다른 영화(예: 『콘클라베』)를 보며 해석을 시도하기도 했고, 봉은사의 선명상대회에 참여하며 마음에 봄을 들이기도 했습니다. 혜민스님의 법문인 "모를 줄 아는 마음"은 답답한 화두였으나, 그 방편을 설하신 말미에서 길이 열렸습니다. 수업 전날 오전에는 광교산으로 매화말발도리를 보러 갔다가 지천에 핀 개별꽃을 만났습니다. 그러다 더 큰 꽃을 발견했는데, 놀랍게도 그것이 '개별꽃'이고, 작고 귀여운 꽃들이 오히려 '큰개별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꽃잎은 다섯 장, 하나의 꽃줄기에 여러 개의 몽우리가 달려 있었고, 덩굴개별꽃도 있는 듯하여 다음에는 뿌리를 확인해보려고 합니다. 길가에 핀 작은 들꽃을 다 안다고 여겨 지나쳤는데 들꽃만 지나쳤으리오.
영화 <박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미 안다고 여겼고, 익숙함 속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를 줄 아는 마음"으로 다가가면 어떨까 궁금해졌습니다.
이 모른다는 마음으로 수업에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모른다 하고 바라보는 마음은, 사랑으로 바라보는 마음과도 같습니다. 영화와의 만남은 곧 나 자신과의 만남입니다. 보고 싶은 영화만을 보는 분별을 잠시 내려 놓았습니다.
수업 시작 30분 전에 도착했는데, 속마음이 들킬까봐 떨렸습니다.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자마자, 수업의 또 다른 과제 영화인 『심판』이 상영되었습니다. 이번 수업을 계기로 박찬욱 감독에 대해 더 궁금해졌고, 그의 인터뷰 채널도 찾아보았습니다. <박쥐>는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였습니다. 저만 불편해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위로받았습니다. 감독의 인터뷰 내용은 인상 깊었고, 모를 줄 아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두 시간의 수업 중 절반은 이론 강의였고, 나머지는 수강생들의 평론 발표로 진행되었습니다. 8시 20분까지 이어진 강의 중에는 제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오래 전 저장 된 기억에 영화 <박쥐>는 억압된 성적 욕망, 가족의 학대, 종교인에 대한 불신이 인상 깊게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불편한 장면도 있었지만, 끝까지 감상한 것은 아마 숙제를 반드시 마치려는 성격이 한 몫 햇습니다.
처음 들어 보는 영화 장면과 함께 이론을 설명해주셔서 영화가 다르게 보였습니다. 마작하는 가족들의 숏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태주는 구석진 곳에서 아주 작게 앉아 있는데 가족내의 태주 위치가 하찮은 존재임을 영화적으로 표현한것이라고 합니다. 영화적 표현을 몰랐던 내게 <박쥐>는 태주의 욕망이 도드라지게 보여 불편했었습니다. 영화의 이면을 보지 못하고 거울과 같은 영화 자막을 보고 영화 감상이라고 했던 어리석음에 심안이 뜨였습니다.
특히 '영화의 모티브를 찾기'라는 강의 내용은 어두웠던 제 마음방에 불을 켜는 듯했습니다. 내가 안다고 본 것과, 영화가 보여주려는 핵심은 전혀 달랐습니다. 선생님께서 본 영화 <박쥐>의 모티브는 ‘순교인가, 자살인가’였습니다. 그 질문 하나로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부의 관점으로 다시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순교인가, 자살인가
영화는 고아원에서 자라 신부가 된 ‘현상현’의 무력함으로 시작됩니다. 사람을 살리지도, 영적으로 구원하지도 못하는 그는 백신 실험에 자원합니다. 엠마뉴엘 연구소에서 이브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과다출혈로 죽었다가 유일하게 살아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뱀파이어가 되었고, 사람의 피를 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이 시퀀스에서 영화는 질문을 던집니다.
"현상현 신부의 백신 실험 지원은 순교인가, 자살인가?" 이 질문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뱀파이어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 온 '현상현 신부'는 어린 시절의 친구의 집에서 태주를 만나고, 둘은 사랑에 빠져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이 과정이 오랫 동안 불편해서 보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그림자를 직면하는것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부모에게 버려진 태주를 신부의 친구 어머니가 거두어 키우다 자신의 아들과 결혼을 시켜 함께 살고 있습니다. 영화의 시공간은 시대와 국적을 해석하기 난해합니다. 일본식 2층 가옥과 양식 식탁에 한복을 입은 어머니, 클래식한 노래와 러시아 위스키 그리고 중국의 전통 놀이 마작하는 신은 괴기스럽기까지 합니다. 박찬욱 감독의 독특한 표현주의 영화입니다. 영화를 감상하는데는 무의식으로 몰입해서 보지만, 영화평론을 쓰기 위해 보는것은 달랐습니다. 영화감독의 사상과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이전 영화를 모두 봐야 했으며 영화 이론을 알고 보면 영화의 내러티브는 달라집니다. 그러나 예술을 감상하는데는 자신이 느끼는 감각을 알아차리는데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순간의 몸의 감각은 감정의 파문입니다.
현상현 신부가 종부성사를 위해 고해성사를 받는 숏은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의 본능을 보여주는 장면을 공포가 아닌 해학적으로으로 연출했습니다. 영화의 시퀀스 시퀀스를 연결하는 플롯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현상현 신부는 한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려고 하지만, 결국 인간의 피를 먹어야 하는 뱀파이어의 본능을 거스를 수는 없었습니다. 콤마 상태에 빠진 효성의 링거를 통해 피를 마시며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뱀파이어가 되어 영원한 삶을 살게해 달라는 노신부의 요청을 거절하고 죽이며 피를 마십니다. 그래도 자신과 같은 뱀파이어는 만들지 않았다고 하지만 태주를 죽이고, 다시 살려내 그녀의 욕망을 채워주는 사랑이 파국을 맞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플라톤의 동굴 비유 오프닝
박찬욱 감독의 <박쥐>(2009)는 시공간을 초월한 미장센의 향연입니다. 오프닝의 현상현 신부가 등장하는 첫 신의 하얀 배경의 아치형 문과 나무 그림자는 심오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 신화적 이미지와도 연결될 수도 있는데 아치형 문과 나무의 그림자는 무엇이 진정한 현실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집니다. 우리가 보는 현실이 단지 그림자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듯 플라톤의 동굴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동굴에 갇힌 사람들이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기에 그들은 진짜 현실을 볼 수 없습니다. 아치형의 문은 그런 입구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문을 넘어선 더 큰 세계, 새로운 차원의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아치 형태는 고전적인 건축 양식으로 고대 철학의 형이상학적 상징을 포함하고 있어 진실로 들어가는 길을 보여주는 입구 같은 이미지입니다. 나무의 그림자는 생명과 죽음, 본질과 환상 또는 생명과 죽음을 나누는 경계처럼 느껴집니다. 나무 그림자는 실체가 아닌 본질이 아닌 것을 비추고 이는 영화 속 등장 인물들의 삶이 그림자, 즉 그들이 진정한 삶을 살지 않고 자신들의 내면적인 공허함을 외면하고 있다는 상징일 수 있습니다. 하얀 배경은 순수한 시작을 의미하고 나무 그림자는 그로부터 생겨난 시간의 흔적으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나 역사의 흐름, 이데아와 현실의 이분법적인 구분을 드러내는 장치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보면, 이데아는 우리가 직접 볼 수 없는 진정한 본질을 가리키고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물들은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박쥐 오프닝은 아치형 문과 나무 그림자가 바로 이데아를 향한 갈망과 그림자에 대한 인식을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영화의 철학적 기조를 시작하면서도 진짜와 가짜, 생명과 죽음에 대한 모호함을 일깨우는 중요한 역활을 합니다.
사랑이라는 신발 엔딩
박찬욱 감독이 <박쥐>라는 영화를 통해 묻고 싶었던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 감각에서 이데아로, 생에서 소멸로, 그러나 그 끝에 죄책감과 지옥이 있다면 그것이 구원일까요? 마음대로 상상해보았습니다.
현상현 신부는 이데아를 향해 갔는가, 아니면 지옥에 떨어졌을까? 상현은 마지막에 소멸을 택함으로써 감각의 세계(피,죄,욕망)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이건 분명히 플라톤식 이데아 회귀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신부였기에 죽음은 단순한 해방이 아니라 죄에 대한 영원한 책임과 심판의 문이기도 합니다. 태주가 엔딩씬에서 말하는 "나는 지옥에 간다"는 말에는 윤리적. 죄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영화의 시선은 구원이 아닌 의식의 극한으로 영화의 결말을 해방이나 구원으로 그리지 않았습니다. 상현을 통해 진실을 아는 자가 끝내 감당해야 할 무게를 보여줍니다. 이데아를 본 자가 감당해야 할 고통, 사랑을 욕망과 분별한 자가 짊어진 죄, 신의 자리를 욕망으로 채운 자의 책임은 구원받은 자의 침묵이 아니라 알아버린 자의 처절한 침묵으로 남았습니다.
영화의 엔딩은 철학입니까?
죽음은 단죄인가 해방인가?
깨달음은 위로인가 고통인가?
진실을 아는 것과 그걸 견디는 건 별개인가?
영화의 시각 언어로 질문이 마구 쏟아졌습니다.
상현의 마지막 선택은 죄로 얼룩진 영혼이 선택한 가장 순수한 윤리적 행동입니다. 이데아를 향한 길이면서 그 이데아가 너무도 날카로워 영혼을 찢는 칼처럼 느껴질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영화는 구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끝에 의식의 깨어남을 놓았습니다. 내가 느낀 혼란과 울림은 감독이 의도한 감각과 사유의 진자 운동입니다. <박쥐>는 플라톤의 철학을 가져오되 그 위에 현대인의 죄의식, 종교, 윤리, 사랑을 섞어 진실을 감당하는 고독한 존재의 초상을 그린 영화입니다. 영화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너무도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그 복잡함을 풀어내려 영화 속을 맴돌았습니다. 어쩌면 집착일지도 모릅니다. 무언가를 알아야만 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을 멈춤니다. 생사의 길은 출세간 너머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며 진실은 반드시 개념의 언어로 말해지는것은 아니기에 영화를 이해하려는 자에서 감각하며 받아들이는 자로 흐르기로 합니다. 그 자리에 질문도 함께 놓아 둡니다.
몽유병을 가장해 맨발로 뛰어다니는 태주에게, 신부는 자신의 신발을 벗어 신겨줍니다. 영화의 엔딩에서는 그 신발을 태주가 다시 꺼내 신고 신부 곁에서 타들어 갑니다. 그리고 신발 한 짝이 ‘툭’ 하고 땅에 떨어집니다.이 장면은 영화에서 시작된 모든 질문을 하나로 연결합니다. '사랑'이라는 신발이 벗겨져 '쿵'하고 마음에 품은 감정 덩어리를 해체합니다. 사랑의 신발은 태주에게 너무 컸습니다. 신부의 사랑은 그녀가 감당하기에 버거운 것이었고, 그 사랑은 태주의 욕망을 흔들었지만 구원하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신발은 함께 타지 않았습니다. 태주는 그 사랑을 끝까지 품지도, 놓지도 못한 채 사라졌습니다. 영화 수업을 듣기 전에는 이 장면을 ‘사랑의 재탄생’으로 해석했지만, 지금은 다르게 봅니다.
신발은 재생이 아니라, 벗겨진 사랑의 잔재이며,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한 존재의 슬픈 퇴장처럼 보입니다.
사랑은 늘 옳은 것이 아니며, 사랑이 줄 수 있는 힘이 반드시 상대를 살리는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때로는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교차점에서 누군가에게 너무 큰 신발을 신겨주어 그 사랑이 힘이 되었을지, 벗어던지고 싶은 무게는 아니었을지 새로운 질문을 남깁니다.
영화 <박쥐>(2009.박찬욱)는 단지 인간의 욕망에 관한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역학과 감당되지 못한 사랑이 만들어낸 파국의 순간을 고요하게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마지막 장면,툭 떨어지는 신발 하나가 모든 사랑의 질문이자 대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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