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에드워드 버거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로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수상한 독일 출신으로 <콘클라베>는 내면의 갈등과 정치적 스릴을 정제된 시선으로 풀어냈습니다. 원작 로버트 해리스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 한 콘클라베의 대사중 다음은 신앙에서 의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영화의 핵심입니다. "저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확신을 가장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확신은 통일의 가장 큰 적입니다. 확신은 관용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조차 마지막 순간에 확신하지 못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의심과 함께 걸어가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권위와 신념 사이의 콘클라베
로마 교황이 갑작스럽게 선종하면서 바티칸은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가 시작됩니다. 주인공 로렌스 추기경은 이 과정을 총괄하는 단장 역할을 맡게 되고, 콘클라베 내부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권력 다툼과 보이지 않는 신념의 대립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단장이 가진 ‘확신하지 않는 믿음’에 있으며, 새로 선출될 교황 후보자들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적인 갈등, 그리고 마지막에 예상치 못한 인물이 교황으로 선출되며 밝혀지는 숨겨진 진실에 있습니다. 영화는 신성함이 완벽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을 껴안고 살아가는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겉으로는 교황 선출이라는 엄숙한 의식을 다루고 있지만, 실상 그 안에는 치열한 권력과 선택, 회의와 흔들림의 연속이 이어집니다.
총괄 단장은 자신의 신념조차 끊임없이 점검합니다. 그의 흔들림은 하느님을 부정하거나 불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교회’라는 제도 안에서 작동하는 권력, 관행, 침묵, 편견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입니다. 과연 이 길이 정말 하느님의 뜻에 가까운가? 그 질문은 무엇이 은밀하게 정당화되고, 무엇이 묵인되고 있는지, 자신조차 그 구조 안에서 얼마나 동조하고 침묵하고 혹은 방조하고 있었는지를 날카롭게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교황으로 선출된 빈센트 베니테즈 추기경은 테러 공격 이후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과거가 아닙니다. 우리가 다음에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대사는 교회가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함을 강조하며, 변화와 개혁의 필요성을 시사합니다. 그의 진보적인 시각은 이후 교황으로 선출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단장은 설교에서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합니다. “확신을 경계하라.” 이는 교회를 지키기 위한 사랑에서 비롯된 말이며, 그 사랑은 안에서 흔들리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교황으로 선출된 인물의 “적은 내 안에 있다”는 말은 그림자를 직면하고 수용하는 시간, 타인의 무례를 이해로 품고, 내 안의 미움도 탓하지 않으며 묵묵히 걷는 여정과 겹쳐 보입니다. 적은 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분별, 집착, 두려움, 미움인 것입니다.
붉은 미장센과 믿음의 공간
<콘클라베>의 시각적 언어는 말보다 더 깊게, 더 빠르게 관객의 무의식에 침투합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바로 ‘붉은 색채’입니다. 추기경들이 걸친 붉은 제의, 붉은 커튼과 깃발, 깊은 붉은 카펫, 그리고 밀실 회의의 배경을 뒤덮는 붉은 벽면은 마치 하나의 강박처럼 반복되며 의식을 조율합니다. 이 붉은 색은 피와 희생, 권력과 욕망을 동시에 상징합니다. 하느님의 피일 수도, 인간의 야망일 수도 있으며, 그 모호한 경계에서 이 영화는 고요히 불타오릅니다.
영화의 대부분이 진행되는 콘클라베 회의실 내부는 폐쇄적이며 균일한 공간입니다. 바깥 세상과는 철저히 차단된 이 구조는 마치 수도자의 침묵 같은 절제를 갖고 있지만, 그 안에서는 치열한 심리전과 정치적 전략이 오고 갑니다. 빛은 단정하게 창문으로 들어오되, 종종 어둠 속에서 인물들의 반사된 눈빛이 드러납니다. 이는 신의 빛과 인간의 그림자, 그 간극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공간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감정의 압력입니다. 인물들이 걷는 복도는 일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투표소로 향하는 걸음마다 미세한 긴장이 서려 있습니다. 그 길은 곧 마음속의 망설임이자 회의의 궤적입니다. 정형화된 절차에 따라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투표, 침묵 속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면은 의식의 미학이자 시선의 정치입니다. 누가 바라보는가, 누가 감추는가. 그 모든 것이 붉은 색의 장막 안에서 벌어집니다.
그 가운데 단장은 종종 붉은 빛을 등지고 앉아 있습니다. 이는 상징적으로 그가 단지 체제의 일부가 아니라, 그 체제를 의심하며 바라보는 시선임을 보여줍니다. 회의가 반복되며, 붉은 색채는 점점 무겁고 깊은 색조로 변화합니다. 그 색의 무게는 단장의 신념이 흔들리는 깊이와 함께 가라앉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황이 선출되고 흰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은, 붉은 장막 뒤에서 이루어진 복잡한 감정과 권력의 연기를 순식간에 망각시키는 장치처럼 느껴집니다.
이 붉은 미장센은 단지 시각적 장치가 아니라, ‘믿음의 정치’가 작동하는 공간 구조입니다. 정해진 길을 따라 걷고, 절차대로 투표하며, 규율에 맞춰 말하는 그 내부에서는 오히려 가장 격렬한 개인적 고뇌와 도덕적 결단이 벌어집니다. 붉은 색채는 그 고요한 폭력의 색이었고, 동시에 그 색을 뚫고 나오는 단장의 ‘흔들림’은 인간성의 실루엣처럼 다가왔습니다.
제도 너머의 인간, 그리고 나의 이야기
<콘클라베>는 교회라는 제도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권력과 신념의 갈등을 그리지만, 더 깊은 층위에서 이 영화는 한 인간이 자신의 내면과 어떻게 마주하는가를 보여주는 수행의 서사입니다. 주인공 로렌스 단장이 보여주는 ‘확신 없는 믿음’은 어떤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성찰적 믿음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그는 자신의 흔들림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지 않습니다. 그 흔들림 속에서 그는 다시 묻습니다. “지금 내가 따르고 있는 믿음은 진실한가? 나는 정말 하느님께 가까이 가고 있는가?”
영화는 교황의 시신을 바라보는 아데에미, 트랑블레, 벨리니의 모습들을 원작과 유사하게 설정해 놓았습니다. 교황의 시신을 옮기는 자세한 과정에 대한 묘사는 영화적으로 어느 정도 요약되어 있으며, 강렬한 장면만을 부각시켜 연출되었습니다. 교황의 시신을 한 인간의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연출은 <콘클라베>의 중요한 지점 중 하나입니다. 자신이 분노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예의를 차리고 우아한 단어로 말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일상에서 나누는 말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런 태도를 가진 영화로서, 서두에서 교황의 시신을 평범하게 연출한 것은 낯설게 다가옵니다.
단장은 자신이 섬기고 있는 교회의 내부 구조, 관행, 침묵, 방조의 그림자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조차 그 체계 안에서 침묵하고 있었음을 자각하며, 가장 깊은 차원의 회개와 책임을 선택합니다. 그가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뇌하는 것은 하느님을 불신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이 진리와 얼마나 가까운지를 성실히 묻기 때문입니다. 그는 더 이상 신의 뜻을 확언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뜻에 다가서기 위한 자기 점검과 내면의 망설임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영화 속 설교 장면에서 단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확신을 경계하라.” 이 말은 단순한 회의가 아니라, 자신 안의 그림자와 정직하게 마주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수행자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흔들릴 수 있는 자만이 진실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단장의 흔들림은 수행자의 길에 가까운 믿음입니다. 겉으로는 흔들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누구보다 중심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러한 단장의 감정까지도 절제하며 연출합니다.
콘클라베에 참석하기 위해 성녀 마르타의 집으로 들어오는 장면은 영화 속 '낯설게 보기' 기법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캐리어를 끌고 들어오는 추기경들의 모습, 아이패드, 핸드폰, 배터리, 담배를 피우는 행동 등은 고풍스러운 공간 안에서 낯선 긴장을 유발합니다. 중세 건축양식과 종교적 기호로 채워진 배경 속에서 현대적인 물건들과 세속적인 행위는 더욱 이질적으로 다가옵니다. 이 장면은 교황의 시신을 보여주는 연출처럼, 이곳이 추기경들만의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오류를 지닌 평범한 인간들이 모인 자리임을 드러냅니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고풍스러운 건축물에 플라스틱이 들어오는 것이 좋았다. 플라스틱은 우리 삶의 일부이며, 그들을 신성화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그들을 신격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균열을 드러내는 데 집중합니다. 영화 후반, 이러한 오류를 상징적으로 끌어안는 인물이 바로 교황으로 선출된 빈센트입니다. 그는 단호히 말합니다. “적은 내 안에 있다.” 그 순간, 단장이 걷고 있던 내면의 길은 더욱 명확해집니다. 진정한 적은 외부에 있는 이단이 아니라, 내 안의 두려움, 권력욕, 분별심입니다. <콘클라베>는 그 어떤 종교적 설교보다도 더 깊이,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침묵과 질문의 서사를 펼쳐 보입니다. 그리고 그 고요한 질문은 스크린을 넘어 관객의 삶에도 조용히 스며듭니다.
얼마 전, 실제로 교황이 선종하고 새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 중계를 보았습니다. 흰 연기가 피어오르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사람들이 박수를 터뜨렸습니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콘클라베>라는 영화가 내게 더욱 내밀하게 다가왔습니다. 영화 속에서 보았던 붉은 제의, 무거운 침묵, 불태워지는 종이, 그리고 마침내 떠오르는 흰 연기—그 모든 것이 이제는 나의 기억과 감정과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한때 수녀원에서 조리원으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종교인과 비종교인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과, 편애의 감정을 분명히 느꼈습니다. 마음 한켠엔 억울함도, 서운함도 남았습니다. 당시 함께 일하던 어린 동료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묵묵히 일했지만, 특정 수녀님의 강한 시선 아래에서 자주 위축되었습니다. 어느 날, 수녀님이 조용히 다가와 내 손을 잡고, 자신도 인간임을 인정하며 솔직한 사과를 전했습니다. 그 진심은 말보다 컸고, 나는 그 순간 ‘수녀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 그분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오랫동안 쌓여 있던 억울함도 서서히 치유되었고, 마침내 그 시간을 감사한 기억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동료의 침묵 속에도 얼마나 깊은 기도가 깃들어 있었는지를, 이제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주방의 불은 단순히 밥을 짓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하루를 준비하고, 기도하고, 조용히 축복하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 시간을 통해 스스로에게도 묻습니다. “나는 누구를 위해 조용히 불을 지폈는가?” 그 대답은 교황청의 금빛 홀 안이 아니라, 내 일상 속의 가장 작은 공간, 나의 손끝, 나의 침묵 안에 있었습니다.
진실은 가장 낮고 조용한 곳에 깃든다는 것, 그곳에 하느님이 머문다는 것을 나는 <콘클라베>를 통해 느꼈습니다. 영화 속 단장의 확신에 대한 대사와, 그들 역시 평범한 인간임을 강조한 연출은 내가 수녀원에서 만났던 수녀님의 용기와 어린 동료의 침묵과도 맞닿아 있었습니다. 그 연결은 나의 수행을 더 깊고, 겸허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확신보다 진실, 제도보다 인간
영화에는 예배당 밖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아네스 수녀의 장면이 등장합니다. 아네스 수녀는 극 전반에 걸쳐 기능적인 캐릭터로 묘사되며, 필요할 때 등장해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녀를 단순한 주변 인물이 아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존재로 설정합니다. 특히 로렌스 추기경이 교황의 숙소 봉인을 풀고 들어가는 장면에서, 아네스 수녀가 몰래 엿보고 있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연출됩니다. 이 장면에서 감독은 아네스 수녀를 클로즈업으로 포착함으로써, 남성 중심의 종교 권력 구조 안에 여성의 시선이 균열을 내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실제로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아네스 수녀나 영화의 다른 요소들이 내게 의미하는 것은, 그 기관과 구조에 금이 가고, 그 금을 통해 빛이 들어오며, 그것이 미래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연출은 우리가 종교에 대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을 흔들며, 사고의 전환을 유도합니다. 아네스 수녀를 통해 드러나는 이러한 균열은 단지 서사의 장치가 아니라, 시각적 상징이자 사유의 단초로 기능합니다. 영화는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포스트구조주의적 시각을 부각하며, 신선하고도 사유적인 연출로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영화의 내러티브 양식은 크게 고전 할리우드 내러티브와 대안적 내러티브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고전 할리우드 영화는 1920년대 이후 스튜디오 시스템 속에서 확립된 폐쇄적 구조의 내러티브 양식을 따릅니다. 명확한 원인과 결과, 직선적 이야기 전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영웅적 캐릭터, 권선징악의 이분법적 구성은 고전 양식의 특징입니다. 시공간의 연속성과 내러티브의 투명성을 유지하는 기술적 요소들—180도 규칙, 연속 편집, 위계화된 조명—역시 이러한 내러티브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로써 관객은 영화의 시공간에 자연스럽게 몰입하고 동일시할 수 있게 됩니다.
이에 반해 대안적 내러티브 양식은 유럽의 예술영화와 제3세계 민중영화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으며, 영화의 상업성과 내러티브 중심의 사고에 비판적으로 응답합니다. 불확실하고 모호한 이야기, 심리적 갈등의 탐색, 열린 결말, 자기반영성과 실험적 영상 기법들은 이러한 대안적 영화의 특징을 구성합니다. 영화는 더 이상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멈춰 서 있는 시점에서 관객 스스로 질문하도록 만듭니다.
이러한 내러티브의 두 경향은 서로 충돌하면서도 영향을 주고받으며 영화미학을 풍요롭게 발전시켜 왔습니다. <콘클라베>는 바로 이 지점에 서 있습니다. 전통적인 종교 의례인 콘클라베를 중심 소재로 삼되, 그 형식은 오히려 대안적 내러티브의 경향에 가깝습니다. 폐쇄적 구조와 직선적 서사를 벗어나, 상징적 이미지와 모호한 내레이션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종교와 인간, 권력과 믿음에 대해 사유하게 만듭니다. 이 영화는 고전적 형식과 현대적 이미지가 교차하는 접점에서, 포스트모던한 영화 언어로 내러티브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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