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 반 산트 감독은 고통과 방황 속에 있는 청춘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연출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인물의 외면보다 내면의 균열을 오래 응시하며, 말보다 침묵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하는 감독입니다. <파라노이드 파크>에서는 죄책감에 짓눌린 소년의 조용한 고백을, <제리>에서는 광활한 사막에서 방향을 잃은 두 사람의 침묵을 통해 인간 존재의 고독을 보여주었습니다. <파인딩 포레스터>에서는 문학적 재능을 지닌 흑인 소년과 은둔한 작가의 우정을 통해 관계가 주는 치유의 힘을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이 모든 영화에서 공통으로 흐르는 정서는 바로 상처 입은 존재에 대한 연민과 고요한 시선입니다.
그중에서도 <굿 윌 헌팅>은 가장 널리 사랑받은 작품이자, 감독 특유의 따뜻한 연출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영화입니다.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지만 깊은 내면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한 청년 윌 헌팅, 그리고 그의 마음에 다가가려는 심리학자 숀 맥과이어의 이야기 속에는 단순한 성공 서사를 넘어선 인간적인 회복의 서사가 담겨 있습니다.
<굿 윌 헌팅>은 우리 모두 안에 숨어 있는 상처받은 자아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스크린 속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의 내면을 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이 영화는 1997년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연출 아래 개봉되었으며, 각본은 배우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이 공동으로 집필했습니다.두 사람은 대학 시절부터 써온 이 시나리오를 통해 처음으로 오스카상을 받았고, 그해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하며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굿 윌 헌팅』은 그렇게 두 청년의 실제 우정과 성장, 그리고 상처의 기록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감정의 벽을 허물게 하고, 자신 안의 연약함을 마주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쓰고 나누는 글쓰기는, 한 편의 영화를 넘어서 스스로를 치유하고 이해하는 문장으로의 여행이 될 수 있습니다.
상처받은 천재, 그리고 닫힌 마음의 문
<굿 윌 헌팅>은 천재성을 지녔지만 깊은 상처로 마음을 닫고 살아가는 한 청년 윌 헌팅이, 한 상담사를 만나면서 조금씩 자기 자신을 마주하고 회복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이 줄거리는 단지 창작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각본을 쓴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은 실제로 보스턴 출신의 오랜 친구로, 이 시나리오는 두 사람이 대학 시절부터 함께 써온 삶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배우로서 불확실한 시간을 지나던 그들은 자신들의 두려움과 가능성을 투영한 인물을 만들어냈고, 그 인물이 바로 윌 헌팅입니다. 그들은 윌이라는 인물을 통해, 상처받은 청춘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고립과 방어의 벽이 어떻게 한 사람의 진심에 의해 서서히 무너지는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 영화는 그렇게 두 청년의 우정과 상처, 성장을 바탕으로 탄생하였고, 1997년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연출 아래 개봉되어 같은 해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하며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영화는 이 천재적인 청년을 영웅처럼 부각하지 않습니다. 윌 헌팅은 낮에는 MIT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밤에는 친구들과 함께 보스턴의 빈민가를 배회합니다.그는 세계적인 수학자들조차 풀지 못하는 문제를 홀로 풀어내는 뛰어난 두뇌를 가졌지만, 그 사실을 결코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철저히 숨기며 살아갑니다. 그는 세상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두렵고,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조차 의심하며 경계합니다. 그가 보여주는 날카로운 통찰과 냉소적인 태도는 사실 타인에게 거절당하지 않기 위한 선제적 방어이며, 진짜 문제는 그의 머리가 아니라 마음 안에 깊이 뿌리내린 상처입니다.
윌은 어릴 적부터 입양과 학대를 반복적으로 겪으며 자라났습니다. 그는 삶의 이면에 자리한 폭력과 부정, 그리고 버려졌다는 감각을 고스란히 품은 채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다가오면 사랑보다 먼저 불신하고, 도움보다 먼저 회피합니다. 그의 삶은 인정받고 싶어하면서도, 동시에 거절당할까 봐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의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그의 반항은 겉으로는 자율과 독립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절대적인 보호자를 내심 갈망하는 고립된 내면의 외침일지도 모릅니다.
<굿 윌 헌팅>은 이러한 윌의 모순적인 태도를 통해 사람이 어떻게 상처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날을 세우고 거리를 두며 살아가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그 모습은 곧 우리 자신의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누구보다 연결을 바라고 있지만, 거절의 상처를 피하기 위해 먼저 스스로를 밀어내는 태도. 그 태도는 때때로 투사로 나타나고, 나르시시즘의 이면에서 외로운 자기애로 뒤틀어지기도 합니다. 이처럼 윌의 삶은 그 자체로,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감정의 거울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단지 천재의 성공담으로 남지 않습니다. 그것은 상처 입은 존재가 다정한 시선 속에서 자기 자신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이야기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는 연약함과 복잡함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한 편의 거울 같은 영화입니다. 이 거울을 마주하고 쓰는 글은 단순한 감상문이 아닙니다.
그 글은 감정을 길어 올리고, 무의식을 언어로 직면하게 하며, 결국엔 자기연민과 자기수용의 문턱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치유 글쓰기는 바로 그렇게 시작됩니다. 내가 느낀 감정에서 도망치지 않고, 그것을 말로 붙들어 보는 연습. 그 연습을 통해, 나도 모르게 지나쳤던 마음의 진실이 드러나고, 영화는 더 이상 스크린 속 이야기가 아니라 내 삶과 내 상처에 닿는 또 하나의 언어가 됩니다.
상처를 알아보는 숀박사와 다른 빛의 스카일라
1) 숀박사와의 만남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오래전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일에 치여 머릿속이 복잡했고, 일에서는 성과가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허탈했습니다. 정신없이 바쁜 삶을 살고 있었고, 영화 한 편을 볼 여유조차 없었던 나를 데리고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가 시작되자 친구는 울먹였고, 내 옆구리를 자꾸 툭툭 치며 보라고 했습니다. 나는 영화도 모르고 감정도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취급받는 것 같아 왠지 모를 불쾌감과 열등감이 올라왔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감정은 친구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 억눌린 감정과 자기 그림자가 비춰졌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나는 인정받고 싶으면서도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고 두려웠던 내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나의 불편한 감정을 투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친구는 그걸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처럼 나도 이 길을 함께 걸을 수 있기를 바랐던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는 돈을 벌어야 했고, 그와 함께 영화관을 다닐 만큼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에게 제대로 응답하지 못한 것이 이제 와서 미안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가 보여주었던 눈물과 다정함은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가장 필요로 했던 치유의 손길이었습니다.
영화 속 윌도 자신을 향한 다정함에 쉽게 반응하지 못합니다. 그는 미 국방부조차 감탄할 만큼 뛰어난 두뇌를 지녔지만,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에는 무척 서툰 인물입니다. 심리 상담을 받게 된 그는 여러 상담사를 거부하며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합니다. 숀 박사와 처음 마주한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방어적인 농담과 도발로 대화를 피하려 했고, 자신의 삶에 누구도 진입하지 못하도록 벽을 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숀은 달랐습니다. 그는 상담실에서 자신의 아내 이야기를 꺼냅니다. 아내가 방귀를 뀌던 기억, 매일 아침 식탁에서 나누던 농담 같은 소소한 일상을 말합니다. 그 장면은 얼핏 유머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숀이 윌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품고 있습니다. 진짜 친밀감이란 완벽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허술하고 민낯 같은 부분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점입니다.
윌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숀은 말합니다. 너는 책에서 사랑을 읽었겠지, 하지만 진짜 사랑을 해본 적은 없잖아. 넌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었을지 몰라도 누군가를 병실에서 지켜보며 밤을 새운 적은 없을 거야. 넌 예술과 전쟁에 대해 인용은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물감을 칠하거나 총알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지. 그의 말은 일침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진심으로 다가가려는 용기의 표현이었습니다. 윌은 수많은 책을 읽었지만 감정을 경험하진 않았습니다. 그의 지식은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한 방어였고, 숀은 그 껍질을 벗기고자 자기의 취약함을 먼저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이 영화를 다시 치유센터에서 보았습니다. 상영이 끝난 후 정신과 선생님의 강의가 이어졌고, 지금도 기억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큰 상처를 받을 경우, 감정을 차단하고 생각만 하게 되는데, 그럴수록 좌뇌가 우뇌보다 발달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좌뇌를 통해 버티는 삶은 겉으로는 지적인 성숙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감정의 기능이 마비된 상태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윌이 떠올랐습니다. 윌이 읽은 책은 그가 겪지 못한 감정의 대체물이었고, 그가 숀 앞에서 당황한 이유는 누군가 자신의 감정을 진짜로 보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숀은 결정적인 장면에서 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너를 알 수 없다" 고 한 숀의 말은 윌의 마음에 스며든 첫 번째 다정함이었습니다.
2) 스카일라와의 만남
윌 헌팅에게 여자친구 스카일라의 등장은 단순한 로맨스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녀는 그에게 처음으로 따뜻한 감정과 웃음을 공유하고자 다가오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밝고 지적이며, 자기 삶에 진심으로 임하는 인물입니다. 윌은 처음에는 그녀에게 매력을 느끼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여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점점 불안해지고, 그녀를 밀어내기 시작합니다. 스카일라는 윌과 진짜 감정을 나누고 싶어 합니다. 그녀는 윌의 상처나 불안정함까지 포함해서 그를 알고자 합니다. 하지만 윌은 끊임없이 거리를 두고, 자신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같이 살자고 제안하는 순간, 윌은 오히려 버럭 화를 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갑니다. 그는 사랑의 제안 앞에서 도망치는 인물입니다. 그것이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서로의 완전함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하지만 윌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아직 인정하지 못했기에, 스카일라의 사랑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상처받기 전에 먼저 관계를 끊어버림으로써 고통을 피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공격성은 사실 두려움의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진심으로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보다, 그 연결이 깨질 가능성을 먼저 떠올리는 것입니다. 윌이 스카일라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너무 많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고통 속에서 살아왔는지, 무엇을 꿈꾸고 무엇이 두려운지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카일라는 울며 말합니다. 나에게 다가와 줘. 너를 알고 싶어. 하지만 윌은 침묵합니다. 그 순간 그는 또 하나의 기회를 잃고, 또 하나의 사랑을 놓칩니다. 이 장면은 숀 박사가 윌에게 말했던 대사와 연결됩니다. 네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너를 알 수 없어. 감정을 말로 꺼내지 않으면, 사랑도 관계도 시작되지 못해. 이 말은 스카일라와의 관계에서 윌이 피하려 한 모든 것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스카일라는 사랑을 나누고자 했고, 윌은 자신을 감추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 거절과 도피의 끝에는 언젠가 마주해야 할 진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진실은, 사랑은 감정의 기쁨이 아니라 상처를 함께 마주하는 용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처음 <굿 윌 헌팅>을 친구와 함께 보았을 때, 나는 그 유명한 장면에서도 멀뚱멀뚱 앉아 있었습니다. 머릿속은 늘 일로 바빴고, 마음은 어디에도 머물지 못했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친구는 조용히 훌쩍였고, 나를 보라는 듯 자꾸 옆구리를 툭툭 쳤습니다. 그때는 그게 짜증났습니다. 왜 자꾸 감정에 휘둘리는 걸까, 왜 나까지 이런 영화에 집중해야 하는 걸까. 마음이 닫혀 있던 나는 친구가 감성적인 사람이라 여겼고, 나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한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 장면이 진짜 나에게 들어온 것은, 훨씬 훗날이었습니다. 친구와 멀어진 후 다시 이 영화를 보게 되었고, 숀 박사가 윌에게 “It’s not your fault”라고 반복해 말하던 그 장면에서 나는 오랫동안 울었습니다. 스크린 속 윌이 아니라, 오랫동안 억눌러온 나 자신을 떠올리며, 또 내 곁에 조용히 있었던 그 친구를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왜 친구는 내 옆구리를 툭툭 쳤는지, 왜 영화가 끝나고도 그 장면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왜 나에게 감정을 느껴달라고 애써 다가왔는지를. 영화 속 윌은 오랫동안 자신의 상처를 부정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는 사랑도 관계도 거부했고, 모든 진심에 대해 공격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자신이 어릴 적 겪은 학대와 방치의 기억은 그를 철저히 방어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숀 박사는 그 벽을 깨기 위해 기다립니다. 그리고 아주 평범한 말로 윌에게 다가갑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윌은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으며 넘깁니다. 하지만 숀은 그 말을 반복합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너의 잘못이 아니야.” 마침내 윌은 멈추고, 흔들리며, 울음을 터뜨립니다. 자신의 고통을 누군가 진심으로 알아봐 준다는 확신, 그 한마디가 윌의 방어를 무너뜨립니다. 이 장면은 단지 상담의 기술이 아니라, 누군가의 아픔에 대해 조용히 머물며 기다리는 태도였습니다. 숀도 어릴 적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몽둥이와 허리벨트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셨지.” 그 역시 상처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털어놓으며, 윌의 마음을 지레 판단하지 않고 다가갑니다. 나는 오래전 친구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할 때를 떠올렸습니다. 농담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그 이야기는 분명히 오랜 세월 묻혀 있던 고통이었습니다. 나는 그 순간, 이 친구를 내가 책임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지만, 그 친구는 이미 내게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을 다른 방식으로 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의 봄은 그렇게 느리게 옵니다. 누구의 다정한 눈빛, 작은 말 한마디, 기다림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나는 친구가 나를 기다려주지 않은 것 같아 서운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치유란 금방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이해하는 데 15년이 걸렸고, 내 마음을 열어 울 수 있는 데도 15년이 걸렸습니다. 그 기다림 끝에 나는 이 장면에서 울 수 있었고, 그 울음은 오히려 친구에게 보내는 늦은 인사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때 그 말,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 한 문장이 내 마음에도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장이 말없이 옆에 있어준 그 친구의 모습과 포개어졌습니다. 어쩌면 그 친구는, 나의 숀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밖에서, 삶을 다시 바라보다
영화는 윌이 떠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사랑하는 스카일라에게 향하는 도로 위, 윌의 뒷모습을 음악과 함께 오랫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그 장면은 한 사람의 변화, 마음의 결심,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단지 사랑을 향한 여정만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의 상처를 인정하고, 누군가를 향해 마음을 열기로 한 결정이었습니다. 그 순간, 윌은 자신을 규정짓던 모든 방어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친구와 함께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땐, 그저 옆자리 친구의 울음에 당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감정을 느끼기엔 너무 바빴고, 감정이 흐를 여백조차 허락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지금, 나는 그 장면에서 오래도록 울었습니다. 친구를 지켜주지 못한 것 같은 자책감은 가짜였고, 나의 상처를 직면하고 투사를 거두어 들이는 치유의 시간 덕분에, 내 안에 감춰졌던 연약함과 슬픔이 비로소 말을 걸어왔습니다.
치유 글쓰기에서 평론 글쓰기로 나아간다는 것은 단순한 기술의 전환이 아닙니다. 그것은 감정을 해체하고, 그 감정이 품고 있는 맥락과 패턴을 바라보는 시선의 확장입니다. 영화 속 인물을 바라보듯, 나 자신의 감정도 조금 더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윌이 숀의 말에 귀 기울이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듯, 나 역시 감정을 꺼내어 언어로 붙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평론이라는 틀 안에서 감정을 분석하고 정리하며, 나는 스스로를 지나치게 동정하지 않으면서도 진심으로 연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화처럼 완벽한 마무리는 없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매일의 문장으로 삶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슬픔도, 그리움도, 후회도 모두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나는 더 이상 영화에 함몰되지 않습니다. 영화는 내 안의 풍경을 비춰주는 거울이지만, 나는 그 거울 속에만 머물지 않고, 다시 내 삶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아주 오랜만에, 내 마음에도 조용한 봄이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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