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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행복

<게이샤의 추억>(2005.롭 마셜)

by 사붓이 2025.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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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개봉한 영화 게이샤의 추억은 일본 교토의 전통문화인 ‘게이샤’를 배경으로 한 미국 헐리우드 작품입니다. 중국계 배우 장쯔이가 주인공 사유리 역을 맡았으며, 공리, 미셸 여오, 와타나베 켄 등 아시아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함께 출연하였습니다. 연출은 뮤지컬 영화 시카고로 유명한 롭 마샬 감독이 맡았고, 총괄 제작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담당하였습니다. 아서 골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1930~40년대 교토를 무대로 한 여인의 삶과 사랑, 예술과 희생을 아름다운 영상미로 그려냅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촬영상, 의상상, 미술상을 수상하며 시각적 성취를 인정받았고, 고전적인 내러티브와 동양적 미학을 결합한 작품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게이샤라는 존재를 소비하는 서구의 시선과, 일본 전통을 미화하는 배경 속에 숨어 있는 역사적 맥락에 대해 비판적 성찰도 필요합니다. 이 글은 영화 게이샤의 추억을 하나의 시각적 메타포이자 제국의 기억을 품은 서사로 해석하며, 헐리우드 영화의 전형성과 일본 전통의 이면을 교차하여 사유하고자 합니다.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 영화

영화 <게이샤의 추억>은 일본의 전통문화와 여성의 아름다움을 예술적으로 포장하지만, 그 안에는 사랑과 성공, 경쟁과 소외, 그리고 국가와 권력에 희생되는 여성의 서사가 숨어 있습니다. 이 영화의 핵심 모티브는 게이샤라는 존재를 통해 ‘여성성’과 ‘예술’, 그리고 ‘권력의 욕망’을 한데 엮어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게이샤는 본래 전통 무용, 샤미센 연주, 시 낭송, 다도, 대화법, 예절 등을 수련하여 연회에서 예술과 교양을 선보이는 예능인이자 교양 있는 예술 수행자입니다. 그러나 영화 속 게이샤는 예술가라기보다 ‘정서적 상품’ 혹은 ‘기억 속의 환상’에 더 가까운 존재로 그려집니다. 주인공 사유리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주체라기보다 선택받고 길러지는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그녀가 연회에서 선보이는 예술은 독립적 표현이 아니라 사랑을 이루기 위한 수단처럼 묘사되며, 결국 한 남성(회장)을 위한 존재로 귀결됩니다. 특히 미즈아게(성인식 겸 처녀성 경매) 장면은 게이샤를 예술가가 아닌 ‘몸의 거래 대상’으로 전락시키며, 게이샤라는 존재가 예술과 욕망, 전통과 권력 사이에 놓인 이중적 기표임을 드러냅니다. 영화는 이러한 복합성을 충분히 탐색하지 않고, 오히려 헐리우드적 욕망의 시선으로 재단합니다.

이러한 설정은 단순히 일본 전통에 대한 영화적 상상력을 넘어서, 서구 남성의 오리엔탈리즘적 욕망이 투영된 동양 여성상의 재현으로 읽힙니다. 중국 배우 장쯔이가 일본 전통의 상징인 게이샤를 연기하고, 이를 미국 감독과 유럽계 제작자가 연출하며, 그 결과물이 서구 관객에게 향유되는 방식은 하나의 문화를 ‘정적이고 신비한 동양’이라는 틀에 맞춰 가공한 구조입니다. 영화 속 게이샤는 현실 속 일본 여성이라기보다는, 유럽 남성들이 동양을 상상하고 욕망해온 방식의 결정체이며, 그녀의 침묵과 복종, 절제된 아름다움은 결국 타자화된 이국적 판타지로 소비됩니다. 이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한 ‘오리엔탈리즘’의 대표적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서구가 동야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이미 정치적이며 권력적'임을 최초로 문학과 학문의 장에서 밝힌 사람입니다. 이는 <게이샤의 추억>이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으로 연출된 작품이라는 것을 뒷받침합니다. 

이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메타포는 ‘꽃’과 ‘비’입니다. 꽃은 피었다가 스스로 져야 하는 여성의 숙명을 상징하며, 비는 정화를 의미하기보다는 기다림과 감정의 침잠을 은유합니다. 춤과 걷기, 눈빛과 침묵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는 게이샤의 상징적 언어로 작용합니다. 몸짓 하나하나에 감정과 역사가 축적되지만, 그 아름다움은 철저히 타인을 위한 것이며, 스스로의 주체성은 희미하게 사라집니다.

내러티브는 전형적인 헐리우드식 영웅서사를 따릅니다. 가난한 출신의 소녀가 훈련과 시련을 거쳐 최고의 게이샤가 되고, 마침내 사랑을 얻는 과정은 동화처럼 전개되지만, 그 여정은 자율적 의지가 아닌 외부의 선택과 시스템 속에서 주어집니다. 사유리는 자유롭게 결정하지 못하며, 그녀의 삶은 운명과 타인의 욕망에 의해 구성됩니다.

고요한 정원, 게이샤의 걸음걸이, 부채를 이용하는 방식,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표정, 오비로 매여 몸매를 감추는기모노의 변형, 촛불의 흔들림처럼 회화적으로 정제된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아름다움은 때때로 정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을 만들어냅니다. 겉으로는 예술의 전통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에는 여성을 하나의 이상적 틀 속에 가두려는 무언의 기획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헐리우드의 상상 속 교토의 아름다운 정원 

비판적으로 본다면 <게이샤의 추억>은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을 담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장면들은 관객의 감정을 정직하게 움직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어린 사유리가 교토의 신사 나무다리를 달리던 순간입니다. 그녀는 팔려온 오키야를 탈출하다 실패하고 가족의 상실을 겪게 됩니다. 교토의 신사에서의 회장과의 첫 만남이 있던 순간입니다. 홀로 울고 있는 어린 치우에게 희망의 말을 전하고 손수건을 건넵니다.  숨을 헐떡이며 나무다리를 건너 그 작은 손을 모아 신에게 기도합니다. “회장님을 다시 만나게 해주세요.” 이 기도는 어떤 종교적 형식보다 더 순수하고 간절하며, 그 한 장면 안에 한 소녀의 사랑과 삶 전체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이 장면은 단지 어린 시절의 회상이나 상처가 아니라,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서사의 동력이 됩니다. 사유리가 끝까지 예술을 견디고, 훈련을 받아들이고, 결국 게이샤가 되기로 마음먹는 이유는 바로 그 ‘한 사람’을 다시 만나기 위함입니다. 이 장면은 명백히 헐리우드식 영웅 서사의 한 축으로 기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사랑을 향한 여성의 일방적 헌신이 얼마나 일찍, 얼마나 강하게 내면화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 달리기는 자유를 향한 도주라기보다는, 억압된 세계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잡기 위한 절박한 몸짓처럼 보입니다.

후시미 이나리신사의 돌계단과 붉은 도리이는 일본 전통의 상징적 배경이지만, 그 공간을 가로지르는 어린 사유리의 달리기는 단순한 미장센이 아닙니다. 그것은 억눌린 여성의 욕망이, 침묵과 절제로 대체되기 전의 마지막 절규처럼 다가옵니다. 그렇기에 이 장면은 영화 전체 중 가장 고요하면서도 격렬한 감정의 파동을 만들어냅니다. 영화적 장치의 존재를 인식하는 관객에게도 정서적으로 깊이 각인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감정의 물결이 흐릅니다. 상실과 위로, 사랑의 첫 경험이 압축된 이 장면은 단순한 서사적 기원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남아 있는 상처와 희망의 기억을 자극하는 상징적 장면으로 작동합니다. 

그러나 이 개인적 감정의 울림은 이 영화가 위치한 시대적 배경과 교차될 때 또 다른 긴장을 만들어냅니다. 영화의 배경은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초, 즉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고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제국의 확장을 가속화하던 시기입니다. 1941년 진주만 공습을 시작으로 태평양 전쟁이 본격화되고, 일본은 아시아 전역을 침략합니다. 그 전쟁 한가운데서 예술과 사랑을 말하는 게이샤는, 실은 국가와 제국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존재로 기능합니다. 영화 속 군복을 입은 남성들이 게이샤의 공연을 관람하고, 전선에서 피로에 찌든 장교들이 위문을 받는 장면은 예술과 여성의 몸이 전쟁을 치르는 도구로 기능하는 현실을 암시합니다. 교토의 고요한 골목, 정제된 기모노, 다도와 춤의 미학은 이 시기 일본 제국이 대외적으로 내세운 '고결한 전통 국가'라는 이미지의 장식물과 겹칩니다. 게이샤는 더 이상 예술인이 아니라, 국가의 문화적 외피가 됩니다. 아름다움으로 감싸진 폭력의 전선. 그녀들은 말하지 않지만, 그 침묵은 국가의 언어가 됩니다. 미와 전통이라는 외형 안에 침묵과 전쟁의 그림자가 겹쳐 있는 장면 속에서, 관객은 비로소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정서와 정치의 교차점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이 정서적 깊이와 시대적 혼란을 궁극적으로 하나의 사랑 이야기로 수렴시킵니다. 사유리는 전쟁과 사회적 붕괴의 한가운데서도 여전히 자신의 감정, 회장을 향한 사랑에 머물러 있으며, 삶의 목적 또한 ‘그 사람에게 닿기 위해 예술을 견뎌온 시간’으로 요약됩니다. 그녀는 전쟁이 끝난 뒤 마침내 회장을 다시 만나고, 그동안 자신이 게이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가 회장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오해는 풀리고, 두 사람은 마침내 조우합니다. 사유리는 눈물 속에서 회장의 손을 잡으며, 이제는 자신이 기다릴 필요도, 숨길 이유도 없다는 듯 조용히 속삭입니다. 이 영화는 결국 침묵하던 여성의 감정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보상받는 결말을 선택합니다.

이 결말은 전형적인 헐리우드 서사의 귀결처럼 보입니다. 사랑은 모든 상처를 덮고, 예술은 욕망을 이룬 뒤 무대 뒤로 퇴장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펼쳐진 무대가 전쟁과 제국주의의 실체를 흐리게 만든 장치였음을 인식하는 순간, 해피엔딩의 감정은 동시에 씁쓸한 이중성을 갖게 됩니다.

 

아름다움 뒤에 가려진 제국의 그림자

영화 게이샤의 추억은 겉으로는 전통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있지만, 그 무대 뒤편에는 분명히 제국주의의 기억과 폭력의 흔적이 흐르고 있습니다. 배경은 1930~40년대, 일본이 아시아를 침략하며 제국의 절정으로 나아가던 시기입니다. 조선은 이미 식민지로 전락했고, 만주에서는 괴뢰정부가 세워졌으며, 중국 본토와 동남아에서는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전쟁은 단지 배경일 뿐, 서사의 중심은 끝까지 사유리의 사랑과 성공이라는 ‘개인적 서사’에 머무릅니다. 게이샤는 이 시기 일본이 세계에 내세우고자 했던 ‘전통 국가’의 얼굴이었으며, 문화 외교의 도구였습니다. 사유리의 기모노, 춤, 다도, 말씨, 그리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몸짓까지는 모두 절제된 미와 고요한 질서로 상징되는 일본의 전통으로 보이지만, 그 속에는 국가의 질서와 군국주의적 정신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여성은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복종하며, 선택받기 위해 자기 자신을 절제합니다. 영화는 이 절제를 예술로 치환하지만, 그것이 국가가 바라는 여성성의 이상형이자, 제국주의적 미의 정치화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더구나 영화는 일본 제국주의의 실체를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위안부, 조선의 식민지화, 전쟁 범죄, 천황 중심의 파시즘 등은 철저히 배제되고, 일본은 단지 전통과 감정의 공간으로만 그려집니다. 이는 미묘하게 전쟁 책임을 지우고, 국가의 폭력을 개인의 사랑과 미의 서사로 전환시키는 헐리우드적 미화 장치입니다. 사실 게이샤는 현대의 일본인들에게 역사적 클리셰에 불과합니다. 게이샤의 삶은 어차피 현대 일본인들에게는 생소하기에 그들의 반응은 시쿤둥한 편이었습니다. 일본을 더 잘 알수록 이 영화를 즐기는데 방해가 될것이라고 한 로저 에버트의 반응이 있었지만,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적 오해에 대한 우려는 이미 예상된 것이었습니다. 

20년쯤 흐른후의 일본이 언급되는 영화 <그랜드 투어>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제국주의의 흔적을 다룹니다. <그랜드 투어>는 정제되지 않은 이미지와 불일치하는 내레이션,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비약을 통해 제국이 남긴 허구적 질서와 인식의 파편들을 들춰냅니다. 서사 대신 이미지가, 일관성 대신 우연성과 파열이 지배하는 구조 속에서, 관객은 어느 지점에서든 '진짜'와 '조작된 기억'을 분별해야 하는 위치에 놓입니다. 전통은 더 이상 아름다운 유산이 아니라, 불편한 과거와 대면하게 만드는 틀로 작동합니다.

결국 교토는 그 두 시선이 겹쳐지는 공간입니다. 신사의 돌계단과 게이샤의 골목길은 ‘조용한 동양’을 상징하지만, 그 아래에는 식민의 기억과 침묵한 목소리가 층층이 퇴적되어 있습니다. 반면 고야산의 사찰, 오쿠노인의 묘지길을 걷다 보면 전혀 다른 정신의 흐름을 마주하게 됩니다. 하나는 제국의 기획으로서의 전통, 다른 하나는 자비와 무상의 수행으로서의 전통입니다. 이 둘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교토라는 도시 안에서 서로 겹치고 침투하며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두 얼굴의 일본, 사유와 순례의 길 위에서 

 

<게이샤의 추억>은 오리엔탈리즘적 미화와 일본 내부의 정체성 구성 사이에 놓인 상징적 충돌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제 곧 그 영화를 촬영한 교토를 직접 걷게 됩니다. 전통의 골목길과 신사, 다다미방과 정제된 정원, 그리고 게이샤들이 걸었던 거리들을 실제로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 속 정적인 미와 복종의 미학은, 이 도시가 품고 있는 수많은 얼굴 중 단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 아름다움 뒤에는 지워진 역사의 침묵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교토는 ‘전통’을 고이 간직한 도시입니다. 그러나 그 전통은 한편으로 천황 중심의 국가신도와 군국주의, 식민지 지배의 명분을 떠받치던 문화 기획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게이샤의 절제된 몸짓은 예술인 동시에 억압의 기호이며, 신사의 도리이는 신성함이자 권력의 상징입니다. 그 길을 걷는다는 것은 곧, ‘아름다움’이라는 이름 아래 침묵되었던 이면의 역사를 마주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와 달리 교토의 또 다른 얼굴은 고야산에서 드러납니다. 사찰과 오쿠노인의 묘지길, 천 년을 살아 숨 쉬는 침묵의 숲. 그곳에는 제국의 목소리는 없습니다. 쿠카이의 수행과 자비, 무상과 연기의 언어가 낮은 숨처럼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제국이 선택한 ‘정치화된 전통’, 다른 하나는 존재의 진실에 귀 기울이는 ‘비전통적 전통’입니다. 일본은 이처럼 두 얼굴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교토는 그 둘이 교차하는 공간입니다. 이 도시의 침묵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그리고 그 침묵을 어떻게 들어야 할지 묻는 시간입니다.

영화는 움직이는 영상과 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예술이자 대중 매체입니다. 1초에 24장의 사진을 영사기를 통해 연속적인 이미지로 제공하는 미장센과 움직임,편집,음향,연기, 스토리등을 종합적으로 표현한 예술입니다. 영화는 감독과 제작자의 창의성이 담긴 작품이며 재미와 감동을 주는 엔터테이인먼트로 시대적 가치관과 이슈를 담아냅니다. 다큐멘터리, 역사 영화등을 통한 학습효과도 있지만 마셜 감독처럼 다양하게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조작하는 예술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푸랑수아 트뤼포틑 "영화는 꿈의 공장이다"라고 했으며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인간은 잃어버린 시간, 놓쳐버린 시간, 또 아직 성취하지 못한 시간 때문에 영화관에 간다"고 말했습니다.

마셜 감독은 영화 속 무용 장면에서 사유리의 고통과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높은 조리의 렌즈를 택했고, 음악과 안무는 헐리우드적 해석을 통해 재창조되었습니다. 그는 이 영화가 '실재하는 교토가 아닌, 상상 속의 도시'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다시금 상기시킵니다. 영화는 삶과 다르지 않지만, 삶이 곧 영화도 아닙니다. 영화는 세계를 꿈꾸고 재현하지만, 결코 그 세계 전체를 품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해석하는 영화는 현실에 어떤 시선을 덧입히는가? 어쩌면 나는 <그랜드 투어>를 보며 제국주의를 비판한다고 했지만, 결국 코끼리의 다리만 만지고 전체를 다 보았다고 착각했던 건 아닐까. 그 영화 속 사찰 시퀀스가 일본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 또한 하나의 조각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인정해야 합니다.

영화의 역사는 19세기에서 21세기를 가로지르고 있으며, 우리의 해석 또한 그 흐름 속에서 유동합니다. 모더니즘이었던 시대가 지금에 와선 포스트모던으로 보이듯, 삶도 영화도 고정된 진리를 품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먼저 걷고, 누군가는 그를 비판하며 뒤따릅니다. 세상은 그렇게 흐르고,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사유합니다. 결국,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영화를 통해 본 일본과 실제로 발을 디디게 될 일본 사이의 간극은, 결국 내 안에 쌓여온 이해의 거리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제 교토와 고야산이라는 두 얼굴의 일본을 마주하며, 그 겹쳐진 역사와 전통의 층위 속에서 감각의 언어를 다시 쓰고, 침묵을 듣는 법을 배워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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