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만에 국내 재개봉한 '다르덴 형제'의 <자전거 탄 소년>은 그들의 작품 세계 안에서 중요한 전환점에 위치한 작품입니다. 1999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로제타>를 기점으로 다른덴 형제의 영화는 신체적 긴장과 현실의 생존 문제를 전면에 배치하는 급진적인 리얼리즘의 시기를 열었습니다. 그 후 <아들>,<더 차일드>를 거치며 인간 존쟁의 윤리적 문제에 천착했고 <자전거 탄 소년>은 이 탐색의 연장선에서 이전보다 덜 급진적이고 더 내면화 된 정서로 방향을 튼 작품입니다.
<자전거 탄 소년>은 이 영화에서 고통받는 존재가 세상과 맺는 관계 안에서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시릴이라는 소년과 그를 받아들이는 사만다의 관계는 이전 영화들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따뜻한 실내의 감정선과 구원의 여백을 품고 있습니다. 이는 다르덴 형제가 신 없는 세계에서 사랑의 기능성을 탐색하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음을 보여줍니다. 사회적 리얼리즘의 테두리 안에 있으면서도 삶의 파편을 응시하는 시선 너머로 작고 미세한 사랑의 가능성을 여는 작품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출발한 두 형제는 벨기에의 쇠락한 공업 도시 세랭에서 살아가는 실존적 인물들을 섬세한 거리감과 무심한 연민으로 그려 내며 현대 유럽 사회의 모순과 인간 내면의 위기를 고찰해 왔습니다. 이들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고발보다는 그 현실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윤리적 갈등에 집중합니다. 이를 통해 관객에게는 감정 이입이 아닌 정서적 응시와 사유의 공간을 제공합니다.
시릴의 자전거
다른덴 형제 감독과의 인터뷰입니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을 알린 영화가 <약속>이었는데, 그 영화는 제레미 레니에 주연의 '전동 자전거 탄 소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전거 탄 소년>에서 제레미 레니에는 아들을 버리는 아버지로 등장합니다. 처음에 아들은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찾아 나서지만, 곧 자신을 보호하고 사랑해줄 미용사를 만나게 됩니다. 벨기에는 자전거의 나라라고 하지만 <약속>과 <자전거 탄 소년>의 영화를 보면 벨기에의 신화와 벨기에 사람들의 일상에서 자전거가 매우 중요한 오브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약속>에서 이고르가 빨간색 전동 자전거를 자주 타는 게 사실이지만, 이고르의 어린 시절과 관계된 오브제는 친구들과 함께 조립한 고카트, 즉 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전거 탄 소년>에서 자전거는 보신 것처럼 유년기의 이동 수단 같은 것인데요. 생애 최초의 탈출을 위한 수단, 혹은 가족을 떠나거나 가족으로부터 멀어질 때 이용하는 수단이기도 하죠.... 저희는 사만다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매우 특별한 자전거, 그러면서 동시에 소년의 친구, 즉 시릴의 친구가 될 수 있고 그의 가장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는 자전거를 찾았습니다. 소년이 너무 외롭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가 자전거와 대화하는 짧은 장면도 삽입했죠. 인간은 외로울 때 특히 사물에 관심이 많아지고, 주변의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인격적인 존재가 되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영화적으로 자전거가 프레임 안에서 만들어내는 움직임은 분명히 전동 자전거의 그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둘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
<자전거 탄 소년>은 한경은 작가의 [당신은 그때 최선을 다했다] 독서 챌린지에 참여하여 '취약성 드러내기' 주제의 장에서 작가가 추천한 치유 영화입니다. 누군가와 연결된다는 것은 서로 취약성을 나누는 일이고 내가 취약해지지 않고 또 취약성을 드러내지 않으면 타인과 진솔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심장이 딱딱해지면 좋겠어, 아부지." 취약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인기 드라마 삼순이의 대사를 예를 들어 흥미로웠던 문장입니다. 삼순이는 사랑이라는 최고의 취약해질 수 있는 감정 앞에서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겟다는 은유로 취약해지기를 밀어내고 있는 중입니다. 치유글쓰기란 에고의 검열이 들어서기 전에 빨리 쓰는게 요지입니다. 15분 짧은 시간에 무의식에서 내보내는 문자를 손가락으로 받아 타자를 쳐냅니다. 에라~ 하면서 시작합니다.
"에라,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알콜중독자입니다. 주 1회, 소주 1병 정도를 더 마실때도 있고 덜 마실때도 있으나 평균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그 정도가 뭐 중독이냐구 괜찮다고 심지어 술을 권하기도 합니다. 50대 전후로 많은 것이 달라지는 걸 발견합니다. 우선 건강이 그렇고 건강에 따라 하는 일이 그렇고 관계의 패턴도 변화가 옵니다. 건강검진에서 하나 둘씩 위험 신호를 받을 때마다 올 것이 오는구나 하며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걷기를 운동으로 술을 끊어도 보고 혈압이 내려 가는 걸 보고 효과에 만족하고 방심하여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한 번 마시면 더 갈증이 심해진다는 겁니다. 나의 음주량은 소주 1병을 넘지는 않지만 잦은 횟수에 문제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오늘만, 내가 다시 술을 마시면 개딸이다하면서 내 안의 중독자에게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중독자는 다음이면 다시 반복적으로 한 번만, 마지막으로 , 오늘만 매달립니다. 젊은 날엔 술에 흠뻑 취하도록 마셔도 봤고 다음날에 숙취는 있어도 일하는데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술 그까지것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끊을 수 있다고 장담 했습니다. 무지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무색해집니다. 새해도 금주를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착실하게 주 1회정도 꾸준히 마시는 중독자를 발견합니다. "중독자야, 너 왜 약속 안 지키니?" 내부 검열자가 나서봅니다. "너 어떻게 죽고 싶은 거야, 이제부터 잠시도 한 눈 팔지 않고 널 지켜 보겠어" 중독자에겐 전기침이 약이라던 법륜스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전기침을 하나 장만해야 하나 봅니다. 어떤 이유로든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는 검열자에게 중독자는 꿀 먹은 벙어리 입니다. 어디론가 숨었습니다. 깊은 무의식의 바다로 조용히 있다가 방심하면 또 나타날 것입니다. 이혼 할 무렵 상담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남편이 나의 음주 습관을 걱정한다고 상담사님께서 말씀 하셨는데 중독자가 항변을 하러 나섰습니다. "스트레스 받으니까 술을 마시지, 언제 내 말을 귀담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때 외로움을 아느냐."고 울부짖었으나 검열자는 모른척 했습니다. 괜찮은 척, 당신이 언제부터 내 걱정을 그렇게 했느냐며 심장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습니다. 나는 요즘 영화를 감상하고 치유글쓰기를 통해 연결됨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sns에 취약한 얼굴을 드러내도 괜찮은 경험을 느끼고 있습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정작 외로움을 느끼게 하고 연결감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의식적으로 영화를 보고 산책을 하며 미술관 산책과 음악을 듣습니다. 중독자가 빼꼼 고개를 들고 일상의 기쁨을 방해하려는 수작을 걸지만 이젠 속지 않습니다. 가벼워지고 강해진 마음 알아차리고 글을 쓰면서 흘려보낸 건 외로움이며 글을 쓰면서 세상과 연결됨을 얻게 되었습니다."
상처받고 힘겨운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고 못하고 방황하는 주인공과 이를 흔들림없이 다독이며 감싸 안아주는 이야기를 담은 <자전거 탄 소년>은 충분히 좋은 사람을 만나 달라지는 주인공처럼 치유의 글쓰기를 하며 스스로 나의 취약함을 기꺼이 나눌 수 있는 누군가와 진솔한 관계를 맺어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치유 글쓰기로 취약함을 공유한 사이, 조건 없이 온전히 이어져 있는 치유의 공동체 안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취약함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고 내가 나에게 하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털어 놓았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다름 아닌 절망이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큰 절망은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는 줄도 모르는 절망입니다. 이때는 마치 중독 상태와 같이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 끊임 없이 다른 곳으로 도피합니다. 조금 나은 절망은 자신이 절망하고 있음을 아는 절망입니다. 이때는 무의미나 덧없음, 고통의 원인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 즉 나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절망에서 빠져나오려 노력할 만큼의 힘은 아직 없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이들 절망에 빠진 모두가 자신을 싫어하며 자기 자신이 되지 않으려 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절망으로부터 빠져나오는 방법으로 신앙을 제시했습니다. 나는 신앙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이 연결됨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신이 아니더라도 타인과 조건 없이 온전히 이어지는 경험이 우리를 정말으로부터 구원한다고 믿습니다. 사랑, 우정, 안전한 치유 공동체 등을 통해 다시 연결됨을 경험하면 됩니다. 누군가와 연결된다는 것은 서로의 취약성을 나누는 일입니다. 영화를 감상하면서 다르덴 감독의 철학 에세이를 읽고 시릴이라는 한 소년의 상처와 사만다의 사랑의 연결을 경험한 느낌을 지금 여기에 또 다른 누군가와 이 글을 공유합니다.
버려진 아이와 꿈꾸는 여자의 캐릭터 탄생 이야기
다르덴 감독의 인터뷰에서 밝힌 사만다와 시릴의 탄생, 영화의 내러티브는 먼 도시의 법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한 일본의 여성 판사가 다르덴 형제에게 들려 준 한 아이의 사연, 고아원에 맡겨진 채 몇 년동안 아버지를 기다리던 소년이 지붕에 올라가 탈출을 시도 할 정도로 절망 속에서 살던 아이였습니다. 그의 몸짓 하나하나가 절규였고 다르덴 형제는 그 안에서 뭔가를 느꼈지만 쉽게 이야기로 옮겨오지는 못했습니다. 버려진 아이, 그 자체로만으로는 영화가 될 수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고독은 영화가 아닌 어느 대본의 안쪽에서 작가 자신들을 갇히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또 다른 시나리오 '한 여성 의사 사마다'의 이야기도 함께 쓰고 있었지만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이 두 이야기가 서로 부딪히며 드디어 다르덴 형제는 물었습니다. "이 버려진 아이의 고통을 , 누군가의 사랑이 구원할 수 있을까?"
그 순간, 폐허 같던 아이의 삶 속에 한 여인이 들어섰습니다. 아이를 구원하는 여인, 그러나 의사는 직업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의사는 이미 누군가를 구하는 사람이니까 그보다 더 평범한 도시의 삶과 땀 냄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미용사가 등장합니다. 미용사는 현실적이면서도 몽상적입니다. 머리를 감기고 자르는 일은 돌봄이자 접촉이고 물을 사용하는 행위는 영화적 상징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르덴 형제는 물을 사랑했고 그들의 영화 대부분은 강변에서 펼쳐졌습니다. 시릴도 물을 좋아해서 그렇게 탄생한 캐릭터 시릴과 사만다입니다. 소년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사랑을 거부했습니다. 사만다는 그런 시릴을 집으로 데려오는 주말 위탁모가 되어주고 그의 상처 옆에 가만히 머무릅니다.
영화 <자전거 탄 소년>의 시릴은 어린 시절이 없는 아이입니다. 감독은 아이가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 질문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할까? 나를 인정할까? " 그리고 사만다에게는 "사만다가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아이에게 어린 시절을 주고, 매일 같이 자신의 실존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평온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줄까?" 그 기회는 아이로 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군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목욕을 할 수 있고 당연한 거지만 매일 "나를 사랑할까, 사랑하지 않을 까"하고 스스로 묻지 않아도 되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이것이 사만다가 시릴에게 어린 시절을 돌려주는 방식으로 그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존 브래드쇼의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 저자의 서문에 시를 소개합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마음속 깊이 소원하는 일이 내게도 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혹시나 내게 이런 일이 정말 이루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크리스마스 때면 마음속 기피 소원하던 선물처럼, 받고 싶은 선물이 내게도 꼭 하나 있다. 그런데 사실은 어느 누구도 이 선물을 내게 가져다줄 수 없다. 사람들은 아마 그런 일은 결코 이루어질 수도 없고, 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지간 나의 어린 시절을 되돌려 받고 싶다. 이것이 내가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이다. 이미 오래전에 떠나가 버린 지난 어린 시절의 아이, 그 아이가 지금도 당신과 내 안에 살고 있다. 그 아이는 당신과 나의 마음 문 뒤에 서서 혹시라도 자신에게 무슨 멋진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하고 오랫동안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뤽 다르덴 감독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중 틈틈히 메모한 내용을 쓴 철학에세이 [인간의 일에 대하여]에서 고백합니다. "시릴을 통해 내 안의 어린 아이가 다시 깨어났습니다." 이는 자신의 내면과 철학을 시적으로 구현한 영화임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감독의 "저희는 인물 안으로 들어가 그의 뱃속에서 살려고 노력하고, 그와 함께 발전하고, 그와 함께 움직이려고 노력합니다." 이 이야기는 그들의 인터뷰를 다룬 [인간을 존중하는 리얼리즘] 첫 장에 소개된 글입니다.
영화속 캐릭터의 탄생을 깊이 사유한 뤽 다르덴의 도서를 읽으면서 단순히 영화감상에서 한 발 더 들어가 치유의 여정으로 들어갑니다.
초당 24프레임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아이 시릴
아빠를 되찾고 싶어하는 아이 내면의 간절함과 긴박감을 표현하는 시릴을 연기하는 토마는 순간순간 빠르게 움직여서 어디 위치하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보육원에 맡겨두고 찾아오지 않는 아빠를 되찾으려는 시릴은 그곳을 탈출합니다. 오프닝 장면에서 작은 사무실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감독의 인터뷰는 시릴의 흥분상태와 내면의 긴장감, 선생님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하는 마음 등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고 밝힙니다. 거기에 사는 사람처럼 최소한만 변경하려 해쓰면서 일종의 단순한 미장센을 추구했기에 카메라를 약간만 움직이면서 인물들이 그 공간 안에 살게 두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시릴은 보육원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햇살과 따뜻함을 가져 온 사만다를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시릴이 주말 위탁을 부탁하자 주저없이 승낙하고 사만다가 일하는 미용실에 데려옵니다. 시릴이 아빠를 찾고 싶어하여 그가 일하는 식당으로 함께 동행합니다.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아빠의 모습은 보이지만 시릴이 아무리 창 밖에서 "아빠" 하고 소리쳐도 문을 두드려도 듣지 못합니다. 이 때 시릴의 움직임이 초당 24프레임보다 더 빠른 움직이었습니다. 시릴과 사만다를 함께 한 프레임 안에 넣어야 할 때 카메라는 뒤로 물러났지만 카메라는 아이의 높이에, 즉 토마의 눈높이에 맞춰졌고 촬영기사들은 카메라를 흉골에 고정시키는 시스템으로 촬영했습니다. 감독은 로우 앵글로 촬영하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메라가 아이의 시점에서 출발해 어른의 얼굴을 촬여하고 다시 돌아오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는 다르덴 감독의 철저한 아이에 대한 집중입니다. 영화의 미장센은 모두 아빠를 되찾기 위해 움직이는 시릴을 위한 장치였습니다. 아이의 감정을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담아내는 그들만의 방식입니다.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아빠의 이야기는 버려짐입니다. 시릴은 사만다가 운전하는 자동차로 돌아 오는 길에 자학을 합니다. 자신의 얼굴을 할퀴는 시릴을 사만다는 가만히 안아주며 "괜찮아" 한 마디 합니다. 그저 꼭 안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만다의 햇살이고 따뜻함을 가져오는 능력입니다. 이 장면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아다지오가 빛처럼 쏟아집니다. 이후 이 음악이 세 번 재등장하는데, 항상 영화 밖에서 대기를 떠돌던 음악이 마지막에는 사만다의 사랑으로 인해 대지에 내려오게 됩니다. 엔딩크레디트에서도 이어지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됩니다. 영화 마지막에 시릴이 사만다의 집으로 돌아 가는 것은 사만다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자 음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말하길 "음악이 바로 사랑기 때문이죠, 영화는 예술이며, 예술에는 우리가 설명할 수 없고 입증할 수 없는 직관이 있습니다. 저희가 시도한 것은, 사만다가 아이를 입양하면서 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 음악 같은 것임을 느끼게 하는 거였죠. 따뜻함과 어루만짐, 다정함에 대한 필요 같은 것 말이죠."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는 음악을 거의 쓰지 않았는데 이 영화를 통해 새로운 시도를 선보였습니다. 음악으로 가득 찬 영화는 아니지만 음악이 실마리처럼 사용되는 순간이 네 번 있습니다. 음악이 높은 곳에서 빛처럼 내려오듯 쏟아집니다. 영화 안에서 흘러나오는것이 아니고, 액션이나 줄거리에서 나오지도 않고, 음악이 줄거리를 극화시키지도 않습니다. 이 음악은 시릴이 기다리는 어루만짐 같은 것, 그에게 결핍된 무엇입니다. 음악이 흐르는 순간은 시릴이 아주 고통스러운 상황, 고통 이상의 상황에 처했을 때입니다. 장 피에르 감독은 '연출한다는 것은 무엇을 숨기는 거고, 무엇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숨긴다는 것은 프레임을 통해 숨기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대사를 통해 숨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관객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며, 무언가를 추측하려다 캐릭터의 행동에 의해 의아해 합니다. 감독의 의도인 것입니다. 장 피에르 감독은 "저희의 기질이라고 생각하는데, 오랫동안 그럴 수 없을 거라 여겨졌던 인물의 관대함을 보여주면서 관객을 놀라게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라고 했는데요. 이 말은 <자전거 탄 소년>의 마지막 시퀀스의 시릴의 용서와 관대함을 보여줍니다.
오랫동안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던 시릴의 용서와 관대함
영화<자전거 탄 소년>에는 여러 아버지, 여러 남자의 초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버리는 아버지, 유혹하는 아버지,"사만다, 이 아이야 나야? 내가 당신을 떠나거나 당신이 아이를 떠나거나 둘 중 하나야"라고 말하며 질투하는 아버지, "우리가 때린 게 아니라고 말해야 해"라고 거짓말을 하는 서점 주인 아버지가 상징적으로 등장합니다. 영화에 또 다른 나쁜 아버지가 될 수 있는 웨스라는 청년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시릴을 제대로 유혹합니다. 패거리의 리더이자 마약상이기도 한 이 불법 세계 속 청년은 자신도 고아였기에 애정결핍과 인정 결핍, 사랑 결핍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년을 유혹하는 방법도 잘 알고 있었지요. 웨스는 시릴에게 불법적인 일을 시키고 실패하자 길거리에 버리고 떠납니다. 서점 주인 남자를 때려 눕히고 돈을 갈취하는 일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시릴의 또래 남자의 아들이 등장하여 시릴은 그또한 야구 방망이를 휘둘러 때려 눕히게 됩니다. 이 사건을 사만다는 경찰서에서 합의로 끝내고 시릴은 서점 주인에게 사과합니다. 이 사건으로 시릴은 사만다가 상처를 이해하는 방식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달리다가 시릴과 사만다는 자전거를 바꿔타며 웃는 장면은 서로를 이해하는 교차하는 영화의 핵심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장면이 왜 중요한지는 감독이 말하는 오랫동안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던 시릴의 용서와 관대함을 성장하게 한 사만다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만다의 사랑으로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관객에게 다시 돌아 오는 햇살같은 따뜻함을 선사합니다.
서점 주인의 아들이 시릴을 때리려고 하자 그를 피해 나무 위를 오르다가 떨어져 정신을 잃게 됩니다. 그 순간에 당황한 서점 주인의 아들은 자신의 아빠를 부르며 어쩔 줄 몰하합니다. 그의 아빠는 아들이 던진 돌맹이를 증거를 없애기 위해 멀리 던져 버리고 우리가 때린게 아니라고 말하라 합니다. 잠시후 정신이 든 시릴은 툭 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 병원을 가자는 그들에게 괜찮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전거에 올라 타 사만다의 집으로 돌아가는 시릴의 등을 비추며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5번> 아다지오가 엔딩과 함께 흐릅니다. 시릴이 영화 밖으로 나가고 음악만 남겨집니다.
시릴은 자신을 때린 서점주인 아들을 용서하는 관대함을 보여 줄만큼 성장하였습니다. 사만다가 아이에게 가져다주고 싶어 하는 따뜻함과 사랑의 분위기가 화면을 가득 채우는 빛으로 다가온 영화입니다. 영화 속엔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와 그를 둘러싼 세상과 자연의 속삭임이, 햇살의 흔적과 나뭇잎의 살랑거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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