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일에 대하여』는 단순히 《자전거 탄 소년》을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그 존재의 토대이자 심리적 씨앗이며 철학적 배경 그 자체입니다. 뤽 다르덴은 시릴이라는 소년을 통해 단지 사회적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시릴의 몸짓과 침묵, 분노, 폭력 충동, 그리고 사랑을 받아들이려는 작은 변화 속에서 "신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남는가"라는 거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1장에서 제시된 죽음의 불안과 신의 부재, 그리고 7장에서 드러나는 사랑의 가능성과 공감의 회복은 《자전거 탄 소년》의 장면마다 정서적 수맥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릴이 아버지를 집착하듯 찾는 장면은 존재를 확인해줄 절대적인 타자를 향한 첫 절박한 외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만다의 무조건적인 수용은 시릴에게 처음으로 자신이 도움을 요청해도 괜찮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심어줍니다. 이는 외부에 대한 최초의 신뢰를 의미하며, 『인간의 일에 대하여』 7장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뤽 다르덴은 이 책의 서문에서 "시릴을 통해 내 안의 어린아이가 다시 깨어났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자전거 탄 소년》이 뤽 자신의 내면과 철학을 시적으로 구현한 영화임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자전거 탄 소년》은 단지 하나의 이야기라기보다, 실존적 질문에 대한 시적 응답이며 『인간의 일에 대하여』는 그 질문과 응답 사이의 내면적 사유를 풀어낸 철학적 일기라 말할 수 있습니다.
1장.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깨어나는 존재
뤽 다르덴은 니체의 선언인 "신은 죽었다"는 문장으로 첫 장을 시작합니다. 신이 부재한 세계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그는 정면으로 묻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 시릴은 그 질문의 화신입니다. 폭력에 노출되고, 사랑 없이 버려진 아이가 어떻게 다시 사랑을 믿게 되었는지를 통해 뤽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인간은 죽음의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두려움을 어떻게 끌어안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하이데거는 "불안은 존재의 심연을 향한 가장 순수한 길"이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그 말 앞에서 부처님의 열반을 떠올립니다.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끌어안고 현재를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존재의 방식이라 말합니다. 뤽 다르덴은 이를 "죽는다는 사실과 연결된 시간 속에서 스스로와 마주하는 눈부신 현재"라고 표현합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삶은 죽음을 피함으로써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정직하게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시작된다고 말입니다. 불안은 저를 현재로 데려왔습니다. 그곳은 찰나처럼 반짝였고, 그 찰나는 제가 살아 있다는 가장 선명한 증거였습니다. 프루스트가 말한 것처럼, 빗소리, 밀크커피 한 잔, 바람의 감촉 같은 소소한 감각들이 시간이라는 강물 속에서 저를 붙들어주었습니다. 결국 삶은 죽음을 향한 순례입니다. 하지만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묻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이 질문은 우리를 존재의 가장 연약한 중심으로 이끕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우리는 마침내 살아 있는 자신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2장, 동물처럼 살고 싶다는 꿈
동물은 존재한다는 의식 없이 존재합니다. 직선적인 시간을 알지 못하며, 살아 있는 순간에 온전히 존재합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저는 문득 시릴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지우지 못해 고통받았고, 미래를 상상하지 못해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지 못했습니다. 시간은 그에게 벌처럼 느껴졌고, 누군가로부터 버려졌다는 기억은 결코 과거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언제든 다시 상처를 되살리는 현재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동물은 과거를 기억하지 않고,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으며 지금 여기에서 살아갑니다. 그들에게 시간은 곧 생명이고, 생명은 곧 존재입니다. 뤽 다르덴은 말합니다. 비시간, 그것은 인간이 잃어버린 가장 순수한 삶의 형식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따라 앞만 보며 걷는 존재이기에 삶은 언제나 유예되고, 고통은 언제나 반복됩니다. 이 끊임없는 직선의 시간은 인간에게 고통과 두려움이라는 비극적 조건을 부여합니다.
그래서 시릴은 자전거를 타고 달렸습니다. 그가 쉴 새 없이 페달을 밟았던 이유는 삶이라는 직선적 시간을 멈추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속도로 그는 시간의 바깥, 동물처럼 존재하는 순간에 도달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 한때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그저 지금 여기에만 온전히 머물며 살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이기에 시간 속에서 존재를 반추하며 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기억을 지니고, 두려움을 품고, 사랑을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살아갈 다른 방법, 바로 깨어 있는 현재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 시작은 고통의 시간을 함께 건너줄 타자의 눈빛에서 비롯됩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존재, 말없이 곁에 있어 주는 누군가. 그 존재가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동물처럼 존재하기를 꿈꾸었던 인간으로부터 깨어 있는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3장, 죽음, 가장 수동적인 상태
죽음 앞에서 인간은 어떤 주체성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느 날 문득 도착하는, 거역할 수 없는 끝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계획도, 어떤 말도, 어떤 의지도 그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하이데거는 말합니다. 인간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뤽 다르덴은 여기에 또 하나의 질문을 덧붙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왜 그토록 깊은 감정으로 인간을 지배하는가.
이 두려움은 단지 죽는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서 잊혀질까 봐, 고통 속에 홀로 남겨질까 봐, 그리고 아무런 의미 없이 사라질까 봐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전거 탄 소년》의 시릴은 사실상 아버지에게서 죽은 자로 간주된 존재였습니다. 그는 살아 있으면서도 버려진 존재였고, 죽음의 그림자 속에 갇힌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강해져야 했고, 더 빠르게 자전거를 달려야 했습니다. 그 수동성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폭력의 충동을 통해서라도 주체가 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결국, 누군가 자신을 기다려 주고, 기억해 주고, 지켜 주는 존재를 통해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아주 미세하고도 인간적인 방식입니다.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살고 싶게 만들어 주는 누군가의 존재가 우리를 삶의 편으로 끌어올립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절대적인 분리의 사건입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덜어 주는 것은 함께 있어 주는 타자의 사랑이며, 그 사랑이 만들어 주는 보호막입니다. 뤽 다르덴은 말합니다. 불안은 오히려 시간에서 우리를 분리시키고, 죽음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의 존재로 우리를 데려다준다고 말입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죽음이란 단지 끝이 아니라, 누군가와의 연결이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 연결이 살아 있는 동안 가능하다는 사실은 삶을, 존재를,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어 줍니다.
4장, 사랑이 시간을 바꿀 수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해 걷고 있습니다. 시간은 직선적으로 흐르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끝을 향한 길은 시작됩니다. 하지만 뤽 다르덴은 말합니다. 어떤 사랑은 이 시간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 사랑은 조건 없는, 타자의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이들이 겪는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아이를 다시 살게 만드는 사랑, 그것은 곧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갓난아이에게 세상이 살 만한 곳이라는 첫 신호가 됩니다. 그 순간, 아이는 말없이 외칩니다. 죽고 싶지 않습니다. 살고 싶습니다.
《자전거 탄 소년》의 시릴에게도 이러한 보호막 같은 사랑이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사만다라는 타자였습니다. 폭력과 분노 속에서도 아이의 존재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그녀의 사랑은 죽음을 향해 달리던 시릴을 살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을 바꾸는 힘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조금씩 행복으로 바꾸고, 무의미해 보였던 시간을 누군가를 향한 시간으로, 함께 살아가는 시간으로 전환시킵니다. 그 사랑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기쁩니다. 그리고 그 말은, 살아 있는 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장 깊은 확신이 됩니다.
사랑 없는 욕망은 인간을 고립시킵니다. 욕망은 반복되고, 그 반복은 타인과의 관계를 끊고 증오와 파괴의 수단이 됩니다. 하지만 타자의 절대적인 사랑은 우리를 다시 관계 속으로 데려갑니다. 살고 싶다는 감각을 회복시킵니다. 그것은 결국, 죽음을 향해 흐르던 시간을 삶을 향한 시간으로 바꾸는 유일한 인간적인 기적입니다.
5장, 힘이라는 이름의 두려움
“힘은 인간에게 존재의 불안을 잊게 해주는 가장 강력한 환각입니다.”
— 뤽 다르덴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세상은 약한 자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고. 그 말은 언뜻 현실을 직시한 듯 보이지만, 뤽 다르덴은 되묻습니다. 그런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는 힘으로 가득 찬 인간은 타자의 무한한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죽는다는 두려움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것을 길들이지 못한 채, 오직 시간과 존재를 통제하려는 환상에 사로잡힌 인간. 그런 인간은 결국 삶의 흐름 속에서 단절되고, 고립됩니다.
다르덴은 보에티우스를 인용하며 ‘시간을 단번에 소유하게 된 인간’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단번에 모든 시간을 가지려는 자는 현재를 살지 못합니다. 그는 과거를 지우고 미래를 통제하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이미 시간에 지배당한 존재가 됩니다. 단번이 아니라 두 번에 나누어 시간을 소유하려는 시도조차 결국 시간의 종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시간은 붙잡히지 않으며, 붙잡으려 할수록 우리는 현재로부터 멀어질 뿐입니다.
《자전거 탄 소년》의 시릴 또한 처음에는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합니다. 그는 죽음과 고통, 분리의 감정을 인정하지 않으려 애쓰며, 오히려 폭력으로 자신을 지키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더 큰 고립을 불러올 뿐입니다. 타자의 무한한 사랑, 조건 없는 수용이 주어질 때에야 비로소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그 연약함 속에서 삶을 다시 받아들이게 됩니다.
진정한 변화는 힘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인정하고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됩니다. 뤽 다르덴은 말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은 타자의 사랑 속에서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인간은 시간과 힘을 지배함으로써 존재의 불안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불안을 인정하고, 함께 머물러 줄 타자의 존재를 받아들일 때, 그제서야 우리는 현재에 살아 있게 됩니다.
6장, 우울과 악, 그리고 닫힌 상상력
“악의 소굴은 우울이다.
그것은 분리된 자의 삶보다 나아보이는 존재 상태를
상상으로 만들어내고, 그 안에 머물게 하는 보호막이다.”
— 뤽 다르덴
우리는 때때로 현실이 견디기 어려워 머릿속에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그곳은 누군가에게는 창조적 상상력의 공간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우울의 피난처가 되기도 합니다. 뤽 다르덴은 말합니다. 이러한 상상력이 타자와 단절된 채 닫힌 세계 속에 머무르게 될 때, 그것은 악의 가능성을 품게 된다고.
악은 언제나 외부를 부정합니다.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관계를 거부하며, 자기 안에 스스로를 가둡니다. 그 세계는 겉보기에 안전해 보이지만, 결국 타인을 제거함으로써 유지되는 보호막입니다. 그 안에 머무는 존재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타인을 인간으로 느끼지 않게 됩니다. 타인의 고통이 더 이상 내게 전해지지 않는 순간, 공감은 사라지고, 타인은 더 이상 관계 맺을 수 없는 대상으로 추락합니다.
이것이 다르덴이 말하는 ‘우울’이라는 악의 토대입니다. 단절, 무관심, 무기력, 고립. 이 감정들이 반복될수록, 존재는 스스로에게조차 닫히고 맙니다. 그러나 이 닫힌 세계에 균열을 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무한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무한한 사랑은 타자의 고통에 귀 기울이며, 그 고통을 완전히 없애겠다고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머물기를 선택하는 방식입니다. 이 사랑은 단순한 감정을 넘어, 존재를 열어두는 삶의 태도입니다. 존재를 닫아버리는 우울과 달리, 사랑은 언제나 열린 가능성의 세계를 지향합니다.
이 사랑이 없었다면, 《자전거 탄 소년》의 시릴은 자전거를 타고 도망치는 아이로만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만다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사랑은 시릴이 닫힌 상상력의 세계에서 조금씩 나올 수 있도록, 외부 세계를 다시 믿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악은 항상 닫힌 세계를 원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열림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매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결국 “누군가의 고통이 내게도 고통으로 느껴지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7장,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
“외부의 도움을 기다리는 것은 살기 위한 투쟁과 마찬가지로 정신 현상의 한 요소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아이에게 엄마는 말한다. ‘지금 간다. 따뜻한 우유 좀 줄게. 네가 아프게 놔두지 않아.’”
저는 이 대목에서 참지 못하고 울고 말했습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과거의 저에게 제가 처음으로 ‘타자’로 등장하였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했습니다.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조차 없었습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은 이미 도움을 받아본 사람이다.” 이 한 문장은 저의 오랜 침묵을 꿰뚫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신뢰, 타인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기억 속 어딘가에 자리했던 따뜻한 손길에서 시작된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손길은 언어가 아니라, 존재의 느낌으로 각인됩니다. 타인의 고통에 손을 내미는 일이 왜 그토록 뿌듯한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누군가를 돕는 것이 아니라, 그가 느끼는 기쁨이 곧 저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나와 너 사이의 경계는 사라집니다. 당신의 아픔이 사라질 때, 저 또한 함께 숨을 쉴 수 있게 됩니다.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도움을 건넨 손은 이름 없는 타자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그 존재는 저의 존재를 되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며 말을 걸 수 있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고립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로, 사랑받은 기억을 품고 있는 존재로서 세상을 다시 신뢰하게 됩니다.
8장, 나를 사랑하게 된 이유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파괴할 수 없는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믿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 뤽 다르덴
우리 안에는 쉽게 무너지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영혼’, 혹은 ‘존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뤽 다르덴은 그 믿음의 근원을 누군가의 절대적인 사랑에서 찾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된 사람은 대개 누군가에게 사랑받은 기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기억이야말로 자기애의 토대이며, 타인을 향한 신뢰의 첫걸음입니다.
카프카는 어느 일기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무엇인가 위로받을 수 없는 어떤 것,
티끌만큼의 위로도 불가능한 어떤 것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뤽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는 이 물음에 대해 오래 사유하며, 위로받을 수 없는 인간 존재에게 절대적인 사랑이 도착하는 순간을 떠올립니다. 그 사랑은 때로 ‘개별적 신’이라는 상징으로 다가옵니다. 그 신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이 신에 대한 믿음은 결국 자신과 타인을 신뢰하게 해주는 근거가 됩니다.
자기애는 타인을 배제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타자의 무한한 사랑을 통해 비로소 ‘나’를 긍정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시작되는 감정입니다. 이러한 자기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힘에 대한 열망, 영원에 대한 욕망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존재가 이미 타자의 사랑 속에서 수용되었다는 기억은, 더 이상 어떤 과시나 지배도 필요하지 않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전거 탄 소년》의 시릴은 처음에는 이 자기애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온전히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만다의 사랑을 통해,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괜찮은 존재’라는 믿음을 품기 시작합니다. 그 믿음은 삶을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가장 내밀한 힘입니다.
🌱 독자 노트
이 장을 읽으며 “내가 기뻐하는 이유는, 타인이 나 때문에 기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문장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습니다. 이 기쁨은 단지 나의 감정이 아니라, 타인의 기쁨이 내 안에서 울리는 순간입니다. 저는 나이 들기 위해 누군가의 사랑을 먼저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지금도 제 안에 살아 있습니다.
9장, 함께 살아가는 기쁨, 민주주의의 조건
“소속의 욕구는 영원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다.”
— 뤽 다르덴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 속하고 싶어 합니다. 그 소속은 단지 사회적 구조 속에서의 위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엘리아스 카네티는 말했습니다. “모르는 것을 접촉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다.” 이 말은 인간이 왜 군중 속으로 숨어들고, 왜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자신을 회피하려 하는지를 설명해줍니다.
군중 속에서 타자는 사라집니다. 사람들은 비슷한 움직임, 비슷한 감정, 비슷한 외침으로 자신을 덮어버립니다. 그것은 죽음의 두려움에서 기인한 회피이며, 진짜 타인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익명성의 방어막입니다. 하지만 다르덴은 말합니다. 진정한 소속감은 ‘인정’에서 비롯된다고 말입니다. 타자가 나를 바라보고, 나를 불러주며, “당신은 여기에 있어도 됩니다”라고 말해주는 순간, 비로소 나는 함께 살아가도 된다는 기쁨을 느낍니다.
그는 파스칼을 인용합니다. “인간의 모든 행복은 존중에 있다.” 이 존중은 법이나 제도보다 더 근원적인 사람 사이의 관계, 공감의 감정, 연약한 존재로서의 상호 수용에서 비롯됩니다. 민주주의란 바로 그 연약함을 전제로 합니다. 힘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죽는다는 두려움을 함께 받아들이는 인간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말을 걸 수 있을 때 가능한 삶의 방식입니다.
《자전거 탄 소년》에서 시릴이 사만다에게 기댈 수 있었던 순간은, 제도나 논리가 만든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너는 괜찮아’라는 말 없이 전해진 작고 확고한 인정의 행위였습니다. 민주주의는 숫자나 규칙으로 유지되는 체계가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봐주고, 나도 그를 향해 손을 뻗을 수 있는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타인의 고통에 연루된 나 자신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 독자 노트
저는 오랫동안 “나를 봐달라, 내게 말을 걸어달라, 나를 사랑해달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람 대신 동물에게 그 말을 건네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존중받지 못한 정신은 참을 수 없다’는 파스칼의 말이, 이 장에서 너무도 선명하게 다가왔습니다. 누군가 내게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세상, 그런 세상이 ‘민주주의’라면, 저는 아직도 그 말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0장, 되돌아 오는 과거, 잃어버린 고향
“트라우마는 인간의 시간을 구성합니다.”
— 뤽 다르덴
트라우마는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 사건은 현재를 흔들고, 미래의 가능성까지 얼어붙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트라우마는 시간의 중심에 놓인 비어 있는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묻습니다. “왜 지금 이 순간, 나는 과거로 끌려가는가?” 그 끌림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르덴은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거부하는 이유는 세상이 더 이상 매혹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 매혹의 원천은 잃어버린 고향에 있습니다. 그 고향은 실제의 장소가 아니라, 어릴 적 무한한 사랑을 받으며 두려움 없이 살아가던 시간, 타자의 시선 속에서 ‘존재해도 된다’는 확신을 받던 바로 그 순간입니다. 그것이 곧 우리 모두가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고향입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직 누구도 실제로 가져본 적 없는 고향이
언젠가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 고향을 향한 능동적 향수가 우리를 다시 삶의 기쁨으로 이끌고,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되돌아오는 과거는 단지 상처의 재현이 아니라, 다시 사랑하고 싶다는 열망의 흔적일 수 있습니다.
《자전거 탄 소년》의 시릴도 계속해서 ‘잃어버린 고향’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고향이란 자신을 다시 품어줄 누군가, 자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해줄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있을 때, 트라우마로 분열된 시간은 다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죽음을 향해 가는 시간이 아니라, 삶을 향한 시간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11장, 아이는 나의 죽음을 데려온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는
어른의 자리를 가져가겠다고,
이미 그 자리를 취했다고 선언합니다.”
— 뤽 다르덴
우리는 아이의 탄생을 기쁨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그 기쁨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불안과 상실의 기척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왜일까요? 다르덴은 아이의 출현을 어른의 죽음을 예고하는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아이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은, 곧 기존의 삶이 끝을 향하고 있다는 자각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탄생은 무에서 전체로, 정지에서 운동으로, 고요에서 강렬한 분열로 이어지는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의 개입입니다. 그 아이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아직 말도 하지 못한 몸짓으로 어른에게 던집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곧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되물음으로 돌아옵니다. 어른은 이 질문 앞에서 당황합니다. 그는 아이를 가르쳐야 하지만,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삶의 공백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르덴은 이 공백을 결핍이 아니라 숨결이 지나가야 할 공간이라 말합니다. 그 공간은 내가 죽는다는 두려움을 잠시 잊고, 아이에게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내 존재를 비우는 자리입니다.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죽음을 가르치는 일이며, 타인을 위해 자기 자신을 잊는 일입니다. 진정한 교육은 사랑받은 사람이 사랑을 다시 건네는 행위입니다. 한때 나도 사랑받는 아이였고, 이제 그 사랑을 줄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는 깨달음. 그것이 바로 ‘양육의 기쁨’이며 ‘삶의 대물림’입니다.
《자전거 탄 소년》 속 사만다는 시릴을 키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아이를 위해 자기 삶의 일부를 기꺼이 내어준 사람입니다. 그 순간 그녀는 시릴의 존재를 받아들였고, 자신의 유한함 또한 받아들였습니다. 아이를 받아들이는 행위는 곧 죽음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며, 타인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품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 모두가 다시 사랑을 믿게 되는 출발점이 됩니다.
🌱 독자 노트
아이의 탄생이 내 죽음의 예고라는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그 말이 진실처럼 느껴졌습니다. 내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그 자리를 누군가가 차지한다는 감각. 처음에는 그 감각이 불안으로 다가왔지만, 이제는 내 삶을 타인에게 내어주는 기쁨으로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12장, 고통을 건너는 예술
“예술은 인간의 고통을 표현합니다.
동시에 이 고통에서 벗어날 출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 뤽 다르덴
예술은 상처를 감추지 않습니다. 예술은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그 고통 속에 스며 있는 인간적인 것을 꺼내어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술은 단지 아픔을 재현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이 고통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한 사람의 질문이자, 또 다른 사람에게로 건네는 침묵의 대화입니다.
뤽 다르덴에게 예술은 자기 자신과 타자, 개별성과 보편성, 절망과 회복 사이를 잇는 중간 지점입니다. 예술 속에서 우리는 가장 연약한 순간을 마주하면서도, 그 연약함을 함께 본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전거 탄 소년》 역시 그런 예술의 예입니다. 시릴이라는 아이는 사회적 약자이자, 감정적으로도 가장 취약한 존재입니다. 그의 분노, 불신, 고립은 현대인의 고통과 절망을 압축한 하나의 몸짓처럼 다가옵니다. 하지만 다르덴은 그 몸짓을 낭만화하지도, 희화화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시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되, 그 고통 속에서 희미하게 피어나는 가능성을 함께 응시합니다.
그 가능성의 이름은 사랑이며, 관계이며, 함께 살아가는 기쁨입니다. 예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나는 혼자가 아니야”라는 확신입니다. 예술은 인간의 고통을 표현하면서도, 그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사람들 사이의 연결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그 회복의 순간, 우리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 독자 노트
이 책을 끝까지 읽으며 느낀 점은, 다르덴이 카메라 너머로 하고 싶었던 말이 단지 사회적 메시지나 윤리적 경고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의 고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타인의 고통 앞에서 눈을 감지 마십시오.”
예술은 결국, 말할 수 없는 것을 함께 느끼기 위해 남겨진 언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존재의 두려움에서 사랑의 가능성으로
인간의 일에 대하여』는 단지 한 권의 철학 에세이가 아닙니다. 이 책은 뤽 다르덴이 형 장 피에르와 함께 만든 영화 《자전거 탄 소년》의 두 인물, 시릴과 사만다를 생각하며 쓴 기록이며, 무엇보다도 한 아이를 통해 인간 존재 전체를 사유한 깊은 고백입니다. 처음에는 다수의 철학자들이 인용되는 문장들에 부담을 느꼈습니다. 니체, 하이데거, 카프카, 스피노자, 프로이트, 비트겐슈타인, 레비나스 등 그 철학적 밀도에 숨이 막혔습니다. 하지만 책을 끝까지 읽고 나니, 《자전거 탄 소년》이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사회적 리얼리즘 영화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불안, 죽음, 사랑, 구원에 대한 철학적 기조 위에서 쓰인 작품이었습니다.
1장부터 3장까지는 존재의 연약함, 특히 죽음의 두려움에 관한 성찰이 중심입니다. 신이 죽은 세계에서 인간은 더 이상 외부의 위로 없이 자기 존재를 감당해야 합니다. 뤽은 하이데거를 인용하며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사유합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수동적이고도 강력한 공포이며, 이 공포는 시간의 직선성 속에서 계속 반복됩니다. 《자전거 탄 소년》에서 시릴은 이 두려움을 온몸으로 드러냅니다. 그는 버려졌고, 외면당했고, 고통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계속 자전거를 타고 달립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아예 그 감정을 무시한 채 몸을 던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더 큰 고립으로 이어집니다.
4장에서 7장에 이르면, 뤽은 타자의 무한한 사랑, 즉 절대적인 관계의 도착 가능성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단어로 간단히 치환할 수 없는 존재적 전환의 경험입니다.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자는 이미 한 번 도움을 받아본 자라는 문장은,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게 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시릴에게 사만다는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조건 없는 수용, 반복적인 신뢰의 표현을 통해 사만다는 시릴에게 새로운 시간, 새로운 감정을 선물합니다. 뤽은 말합니다. 죽음을 향한 시간이 사랑을 통해 삶을 향한 시간으로 바뀔 수 있다고.
8장과 9장에서는 사랑을 통해 회복되는 자기애, 그리고 소속감과 민주주의적 삶의 가능성이 다뤄집니다. 시릴은 처음에는 누구도 믿지 못했습니다. 타자와 관계 맺을 수 없었던 아이는, 사만다의 사랑 속에서 자신을 다시 믿기 시작합니다. 뤽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기쁨이 발생하고, 타자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는 그 순간이 바로 인간의 인간다움이라고 말합니다. 소속감은 힘이나 영원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인정받고, 사랑받았던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영화는 이 지점을 아주 조심스럽게 그려냅니다. 어떤 제스처 하나, 어떤 손길 하나가 시릴의 고립을 천천히 녹여냅니다.
10장은 트라우마와 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왜 우리는 과거로 계속 되돌아가는가? 그것은 단지 기억이 아니라, 치유되지 않은 고통이 여전히 우리 현재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뤽은 이 고통의 반복을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되찾고 싶은 고향에 대한 능동적 향수”라고 설명합니다. 시릴이 끝없이 자전거를 타는 행위는 바로 그 고향, 잃어버린 사랑, 되찾고 싶은 시간에 대한 몸짓입니다. 하지만 그 고통을 끌어안고 함께 있어주는 타자의 존재가 있을 때, 그 시간은 고통만이 아닌 기쁨의 가능성을 품게 됩니다.
11장에서는 아이의 탄생과 어른의 죽음이 교차합니다. 뤽은 아이의 탄생이 어른의 자리를 밀어내는 사건이며, 동시에 사랑의 능력을 회복시키는 계기라고 말합니다. 아이는 어른에게 정체성을 묻고, 어른은 그 질문 앞에서 자기 존재를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교육이란 결국 나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사랑의 반복이며, 죽음의 두려움을 잊게 만드는 삶의 연장입니다. 사만다는 이 영화에서 어머니가 아니지만, ‘어른’으로서 사랑을 주는 존재가 됩니다. 그 사랑은 교육이며, 책임이며, 죽음을 딛고 관계를 지속하겠다는 다짐입니다.
마지막 12장은 예술에 대한 성찰입니다. 예술은 고통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그 고통에서 벗어날 출구를 함께 상상하는 인간적 행위입니다. 《자전거 탄 소년》은 연약함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그 연약함을 함께 바라보는 시간을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이 영화의 위대함입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면서도, 그 고통 안에 담긴 구원의 가능성을 놓지 않습니다. 그것은 철학이기도 하고, 예술이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기도문입니다.
『인간의 일에 대하여』를 읽고 나서 《자전거 탄 소년》을 다시 보았을 때, 저는 시릴이 더 이상 한 소년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 존재 전체의 비유였고, 사만다는 그 존재를 끝까지 붙들어주는 사랑의 가능성이었습니다. 다르덴 형제는 말합니다. 고통받는 이가 타자의 사랑 안에서 다시 말하게 되는 순간, 그때 인간은 비로소 존재하게 됩니다. 철학이 영화가 되고, 영화가 철학이 된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이제, 우리는 대답할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누군가의 사랑 덕분에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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