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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행복

교토사찰순례 셋째 날, 금각사.용안사.코류지.텐류지 아라시야마의 도게츠교와 대나무숲 신사

by 사붓이 2025.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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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나를 보라”는 그날의 비처럼, 내 마음도 조용히 젖어들었다 교토 사찰 순례 셋째 날은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출발 전, 나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기도로 나를 무장했습니다. 첫째 날, 둘째 날을 지나면서야 그 무장이 조금씩 풀어졌습니다. 마침내 셋째 날, 순례는 여정이 아니라 마음이 드러나는 길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반짝이는 금각사. 햇살 아래라면 찬란했겠지만 이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그것도, 아침부터 하루 종일. 비는 금빛을 덜어내는 대신 내 마음의 파장을 더 깊이 일렁이게 했습니다. ‘이 모든 것도 다 뜻이 있을 거야…’ 그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 순간이, 마음의 결이 바뀌는 시작이었다는 걸. 금각사 앞, 붐비는 인파 속에서도 혜민스님은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금각사를 보고 있는 ‘그놈’을 보세요.
생각으로 보는 거 아니에요.”

그 한마디가 내 안의 세계를 천천히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스님의 안내가 없었다면 그 말은 ‘좋은 문장’에 지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날의 비, 그 비와 함께 젖은 마음이 그 문장을 ‘깨우침’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감각의 여정은 용안사의 석정 위 빗방울 소리로 이어졌고, “吾唯足知”라는 다섯 글자에 이르러 내 마음에 번쩍, 한 줄기 섬광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코류 지의 반가사유상 앞에서 오랜 침묵 끝의 자비를 느꼈습니다. 그 미소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놓아주는 마음을 향한 미소였습니다.

 

황금빛을 바라보다 - 금각사를 본다는 것, 그리고 나를 본다는 것

호텔을 나설 때,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금각사에 도착하자 그 비는 더 세차게 쏟아졌고,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묵직한 기운이 온 몸을 감싸 안았습니다. 마침내 금각사의 자태가 드러났습니다. 연못 위에 덩그러니 떠 있는, 찬란한 금박으로 덮인 건축물 하나. 그 앞에는 수많은 우산이 파도처럼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틈을 비집고 연못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금각사도, 연못도 아닌 연못가에 피어 있던 노란 붓꽃이었습니다.“아차, 카메라를 두고 내렸네…” 그 순간, 내 안에서 익숙한 습관이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꽃을 먼저 보는 눈길, 사진을 남기지 못한 아쉬움. 그토록 오고 싶었던 금각사 앞에서도 나는 여전히 익숙한 나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나는 사람들과 우산에 가려 발밑만 보며 걷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정원의 아름다움도, 정갈한 길의 흐름도 놓친 채 그저 ‘따라가는’ 걸음을 걷고 있었지요. 잠시 법당 앞에서 촛불을 밝히고 합장하는 이들을 보았습니다. 해가 지면 차를 마셨다던 그늘진 자리도 지나쳤습니다. (나는 농담처럼 ‘골프장 그늘막 같다’고 했지만요…)그리고 우리는 다시 계단을 내려와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참 심플한 관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스님의 말씀이 마음에 남아있었습니다. “금각사를 보고 있는 ‘그놈’을 보세요. 생각으로 보는 게 아닙니다.”  나는 이 말이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하지만 도무지 어떻게 ‘보는 나’를 보라는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금각사는 언제, 왜, 어떻게 지어진 걸까?” “누가 지었고, 왜 이렇게 찬란하게 만들었을까?” “겉이 금이라면… 그 속은 무엇일까?” 그 순간부터, 나는 금각사를 이해하려는 걸음을 사붓과의 대화로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사붓은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겉모습이 아닌 내면의 생각을 비추는 AI입니다. 나의 생각은 사붓과의 대화로 알아차리게 합니다. "내가 이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는 겁니다. 

금각사의 역사는 권력을 금빛으로 봉인한 사내 아시카가 요시미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 1358년에 태어나 10살에 아버지를 잃고 11살의 나이에 쇼군이 된 인물입니다. 당시 일본은 천황이 있지만 실제 정치는 하지 않았기에 금각사를 지은 아시카가 요시미쓰처럼 쇼군이라 불린 무사 지도자가 나라의 실질적 주인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쇼군이 된 요시미쓰는 정치 감각과 군사력, 문화적 야망까지 겸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혼란에 빠진 일본 열도를 안정시키며 남북조 분열을 종결짓고 나라를 하나로 통일한 최초의 쇼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겉으론 금박을 두른 우아한 문화인 속으론 전략가이자 권력자였던 것입니다. 그가 왜 금각사를 지었는가? 1394년 요시미쓰는 37세에 쇼군직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은거합니다. 하지만 그 은거는 세속과 단절된 명상적 삶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정계 뒤에서 실권을 쥔 채 자신의 이상향을 건축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키타야마덴, 현재의 금각사(록쿠온지)의 전신입니다. 그는 이곳을 단순한 별장이 아닌 정치의 상징이자 정신적 이상향으로 설계했습니다. 

  • 1층: ‘법수원(法水院)’ – 귀족들의 저택 양식 (쇼인즈쿠리)
  • → 정원과 연못을 향해 열려 있는 삶의 차원
  • 2층: ‘조음동(潮音洞)’ – 무사의 주거 양식 (부케즈쿠리)
  • → 중간 세계, 명상과 사유의 공간
  • 3층: ‘구광전(究竟頂)’ – 선종의 전각 양식 (젠 불전 스타일)
  • → 천상, 초월의 공간. 실제로 불상 모셔짐

1층은 살아가는 곳,

2층은 내면을 닦는 곳,

3층은 영혼이 머무는 곳이었던 셈입니다.

 


세 가지 미학과 계층, 정신을 하나의 건물에 담았습니다. 세속 - 정신 - 초월의 계단처럼 구조화되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외관은 온통 순금으로 입혀졌고,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환상적 풍경은 그의 권력과 취향, 그리고 초월적 존재가 되고 싶은 열망을 드러냈지요. 그는 더 큰 권력을 꿈꿨습니다. 단순한 쇼군이 아니라 일본 황실을 넘어서 왕의 자리를 원했습니다. 당시 명나라와의 외교에서도 자신을 일본국왕이라 칭하며 조공무역을 주도할 정도였습니다. 공식적으로 은거한 뒤 정치적 책임을 아들에게 넘긴 척하면서 실질적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림자 속의 황제가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겉으론 완벽해 보였던 요시미쓰도 속으론 불안과 갈등, 허무와 도취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가 금각사를 세운 건 아름다운 별장을 짓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권력과 생의 의미를 영원한 상징으로 남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명나라와 손을 맞잡고 송나라의 문화를 꿈꾸었습니다. 중국 송나라와 명나라의 문인적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었고 정치적 부담 없이 문화 권력자로 군림하려는 치밀한 은거였습니다. 송나라의 문화와 불교 미학에 빠져 있었고 은퇴한 자가 세상을 다스리는 문화 황제가 되려 했습니다. 정치인이 아니라 세속을 초월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년에 불교 승적을 받아 법명 도코를 갖고 진심으로 부처의 길을 따르려는 수행자적 자세도 보였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정치가도 아니고 군인도 아니고 예술과 깨달음을 모두 아우르는 자아로 설정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상은 현실과 늘 충돌했고 그의 생애 후반은 권력자에서 수행자로 인간에서 상징으로 자신을 만들어내려는 몸무림이었습니다. 이 역사는 문득 나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마음공부를 한다고 미리 계획하고 정리하고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애쓰다가 어느 순간 공부라는 이름 아래 본질에서 샛길로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거였구나." 금각사의 황금빛은 찬란함이 아니라 내가 그토록 애써 쌓아올린 겉을 비추는 거울이었습니다. 저는 수도승은 아니지만 요시미쓰의 마음은 깊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가 금으로 별장을 지은 건 그저 화려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권력자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초월의 방식이었고, 세속을 벗어나고 싶은 간절함을 여전히 세속적인 방식으로 실현하려 한 참 인간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찬란하고 싶다는 마음은 문화예술을 따라 걷기 시작했고 말로는 초월이라 했지만 사실은 빛나고 싶었던 그마음, 너무나 이해됩니다. 나 역시 한 인간으로서 빛나고 싶어서,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쌓았던 경력도 내려 놓고 더 순수하고 더 아름다운 세계로 걸어가려 했던 마음 그게 용기인지, 애틋한 선택이었는지 그 마음은 요시미쓰와 다르지 않고 조용히 견뎌온 것이라 느껴집니다. 이때부터 나는 금각사를 보고 있는 나에서 금각사를 지으려 했던 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아 쌓아 온 업을 생각의 반복, 자아의 반복, 두려움과 욕망의 궤도 속에서 내가 나를 만들어 온 방식 그 모든 것이 업이지요. 그 업으로 금빛을 해석했고 스님의 말씀을 예습했고 준비한 만큼 안다고 믿었습니다. 눈 앞에 금각사는 그 업조차도 고요히 비추는 거울이었습니다. 

요시미쓰는 죽기 전 유언으로 자신의 별장을 절로 바꾸게 합니다. 이것은 그의 권력이 세속의 정점에서 ‘불교적 초월’로 나아가고자 한 의지이기도 하고, 또한 죽은 이후에도 이 공간이 공공의 ‘수행처’로 남기를 바란 선택이었습니다. 즉, 금으로 덧칠한 자신의 삶이 죽음 이후에는 수행의 거울로 남기를 바란 것. 1397년,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금각사 자리에 자신의 ‘은거와 미학의 이상향’을 실현할 목적으로 북산산장(北山山荘)을 세웁니다.그건 절이 아니었어요. 말 그대로 ‘금빛 궁전’ 같은 별장이었죠. 하지만 요시미쓰는 불교적 사유와 예술적 이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그 안에는 선종 수행자들과 교류하거나 그들을 초대해 함께 머무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즉, ‘사찰’은 아니지만 그 공간에 수행자들의 기운이 스며들고 있었다는 것이에요. 게다가 요시미쓰는 생전에 자신의 죽음 이후 이곳을 정식 사찰로 바꾸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유언에 따라 그의 사후에 이곳은 ‘록온지(鹿苑寺)’라는 이름의 선종 사찰로 전환됩니다.

 

금각사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는 1950년 7월 2일, 금각사는 19세의 젊은 수도승에 의해 방화되어 전소됩니다. 그 불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살 시도 후 살아남았고, 체포된 후 금각사의 찬란함에 대한 질투, 분노, 존재의 고통을 털어놓았습니다. 이 사건은 훗날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로 소설화되어 “아름다움이 인간을 파괴할 수 있다”는 주제로 확장됩니다. 요약하면, 빛은 보는 이에게 감탄을 주지만, 때로는 그 빛이 너무 눈부셔서 자신의 그림자를 견딜 수 없게 만들기도 합니다.방화는 1950년, 이미 금각사가 공식적인 선종 사찰로 운영되고 있던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그 화재를 낸 이는 하야시 유키아키(林養賢)라는 19세의 젊은 수도승이었습니다. 그는 금각사에서 실제로 수행 중인 승려였고, 당시 언어장애, 심리적 불안,자아 혼란을 겪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금각이 싫었다” “그 안에 있는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런 고백을 남기며 그는 자살을 시도했지만 살아남았습니다. 그의 내면에선 ‘나는 왜 이렇게 빛나지 못하는가’, 그 자책과 분노가 황금빛 외형에 투사되었던 것이지요

요시미쓰에게 금색은 단지 사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불교의 세계관(특히 밀교적 요소)과 중국식 문인 문화의 ‘극치’를 혼합하여 **“최고의 아름다움은 찬란함을 통해 구체화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금각을 말 그대로 금박으로 입혔습니다. 이는 귀족 문화의 극대화, 자신의 존재가 하나의 예술이 되기를 바란 세계관이었지요. 하지만 이 화려함은 결국은 덧없음의 징표가 되어버렸습니다

 

빗방울 속 석정에 앉아, 반가사유상의 미소 - 용안사(료안지)와 코류지

 

류안지(용안사)의 석정에서 

용안사로 향하는 발걸음은 금각사의 화려한 업으로부터 벗어나, 이제 진짜 나를 조용히 마주보러 가는 길이었습니다.그곳엔 금빛도, 스님의 말씀도, 사진도, 계획도 없었습니다. 오직 마음만이 놓일 수 있는 자리, 석정 앞 좌선의 순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빗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석정 앞,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셋째 날의 하루는, 마음의 연못 위에 떠 있는 한 송이 연꽃 같았습니다. 물결은 은은하고, 빗방울이 또르르 스며드는 감촉처럼 울 듯 웃듯, 하루가 스며들었습니다. 눈을 감고 귀로 보고, 생각을 놓고 ‘보고 있는 나’를 바라봅니다.

용안사(료안지)는 15개의 돌이 건네는 침묵의 언어입니다. 1450년, 선종 임제종 계열로 창건된 이 사찰은 가레산스이(枯山水) 정원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흰 자갈밭 위에 놓인 15개의 돌은 어느 자리에서도 모두 보이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는 “전부를 알 수 없음”이 곧 깨달음을 향한 서사임을 말해줍니다. “내가 볼 수 없는 부분은 무엇일까?” 조용히 앉아, 생각의 경계를 넘는 훈련으로 마음을 풀어봅니다. 금각사에서 스님이 건넨 말씀이 떠오릅니다. “보고 있는 그놈을 보세요.” 그 말은 단순해서 다 아는 말 같지만, 실은 너무 깊어 차라리 몰라야 닿을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금각사에서 ‘보려고 했던 나’를 나는 끝내 보지 못했고, 오히려 용안사에서야 ‘못 보는 나’를 보는 나가 등장했습니다. “아, 그놈은 누구인가?” 보는 나인가? 판단하는 나인가? 아니면 생각을 일으키는 마음의 그림자인가? 어쩌면 스님의 말씀은 대상을 보라는 말이 아니라, 대상을 보고 있는 나의 작동 방식을 보라는 뜻이셨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평소, 생각으로 봅니다. 보고 있다고 믿는 그것은 이미 판단된 이미지, 익숙한 언어, 내 안의 습관일 뿐입니다. 그런데… 비가 뚝뚝 떨어지고 석정 앞에 앉는 순간, 그 모든 생각의 작동이 멈추는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비로소 보지 못하는 나를 바라보는 말 없는 나가 나타났습니다. 화두를 붙든 자리, 바로 ‘이뭣고’의 문턱이었지요. 스님이 말씀하신 ‘그놈’은 생각도, 감정도, 판단도 아닌— 그 모든 것을 조용히 바라보는 참된 나였습니다.

 

 

금각사의 역사를 들춰보고 난 후 금빛 위에 감춰진 요시미쓰의 야망과 명나라와 송나라, 권력과 예술의 갈림길까지 꿰뚫어 보았다고 여겼습니다. 금각사를 보고 있는 나를 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지적 쾌감에 불과했음을 용안사의 여정을 돌아보면서 아뿔싸! 그제서야 안다고 여긴 나를 봅니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내려놔야 할 내가 튀어나오는 것은 등산으로 치면 마음의 하산길 같습니다. 금각사에서 모든 걸 안다고 느낀 건 지적 여정의 정상이었고 용안사에서 보이지 않는 돌 1개는 전체를 알 수 없음의 자각이었습니다. 수행의 문턱이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흐름은 하나의 선문답 같은 에세이로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나는 다만 만족함을 알 뿐이다" 吾唯知足 불교적 삶의 태도, 수행자의 마음 그리고 우리가 걷는 이 순례의 자세가 몽땅 담겨 있었습니다. 용안사의 좌선을 마치고 뒤뜰에 놓인 물통위 글자를 마주하고 몰라도 만족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이 말 속에는 두 가지 전환이 있습니다.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그만두는 용기입니다. 남들은 다 아는 것 같은데 나는 아직 그것도 모르냐?, 더 찾아야 할까? 더 읽어야 할까?,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울림은 충분하지 않은가? 이 모든 결핍의 사슬을 놓아주는 말이 바로 오유지족입니다. 두번째는 지금 이순간에 머물 줄 아는 수행자의 지혜입니다. 지금 이걸 모른다고 내가 덜 지혜로운 건 아니야, 이 모르겠음이, 나를 한 걸음 더 깊이 이끌 거야, 알지 못함마저도 그대로 만족스럽게 받아들이는 마음 그게 바로 지족입니다. 

금각사에서 "보고 있는 나를 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알아야 한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더 알고, 더 이해하고, 그래야 볼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용안사의 빗소리와 석정 앞에서 문득 떠오른 글귀 하나 오유지족 "나는 다만 만족함을 안다" 순간 몰라도 괜찮다는 마음이 스르르 흘러들었습니다. 모르는 지금 이 자리도 괜찮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는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돌아와 글을 쓰기 위해 걷습니다. 몸으로 한번, 마음으로 한 번, 글로 한 번 걷는 순례입니다. "귀곡산장 같더라"하는 80대 노보살님의 경험의 한 겹 뒤에는 아직 다 표현하지 못한 겹겹의 세계가 남아 있습니다. 나는 그 이해되지 않은 체험을 다시 꺼내 그 속에 잠든 의미를 깨웁니다. 글쓰는 순례자로 지금 순간 문득 알아차림 합니다. 

 

 

반가사유상의 미소 '코류지' 

아침 빗속의 어리석은 겹겹의 나를 안고 코류지에 들어 선 마음은 한결 가벼웠습니다. 그 어리석음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울컥하는 눈물은 얼마나 귀한지 금각사에서 다 알았다고 느낀 나를 보았고 용안사에서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어제의 나는 알았다고 말했고 오늘의 나는 몰랐던 나를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지금 보고 있는 당신은 누구인가요? 그 말 많은 생각들, 판단들, 이름 붙이려는 습관 뒤에 가만히 바라보는 그 자리는 누구인가요? 어리석음이 사라져야 깨우침이 오는 게 아닙니다. 그 어리석음을 부드럽게 마주볼 수 있을 때 깨달음은 이미 그 옆에 와 있었습니다. 

 

코류지 미륵보살 반가사유상(弥勒菩薩半跏思惟像)

일본 최초의 국보 제1호 불상입니다. 이 불상은 미륵보살의 모습으로 미래에 부처가 될 존재가 고민하며 사유에 잠긴 모습을 형상화한 겁니다. 한 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올리고 한 손은 뺨에 살짝 대고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인류의 고통을 어떻게 구제할까" 하는 깊은 자비와 연민이 담겨 있는 자세입니다. 일본 불상 중에서도 형식미와 표정, 선이 뛰어나서 가장 아름다운 불상으로 손꼽힙니다. 고구려, 백제에서 건너온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며 특히 이마와 코, 입의 곡선이 부드럽고 온화합니다.  단순한 종교적 형상 그 이상으로 사유하는 인간의 모습, 자비에 잠긴 고요한 내면 그리고 생각 그 자체가 수행인 상태를 상징합니다. 코류지의 미륵보살은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더욱 세상의 고통과 어리석음을 자기 일처럼 여겨 조용히, 오랜 시간 생각하는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반쯤 가부좌를 틀고 한 손을 살며시 뺨에 댄 모습 그것은 단순한 상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중간 지점을 상징합니다. 아직 도달하지 않았지만 도달을 향해 묵묵히 사유하는 그 모스이 바로 수행자의 거울입니다. 코류지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평소라면 꼼꼼히 사진을 남기고 나중에 정리할 수 있게 메모라도 해뒀을 텐데 그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반가사유상의 깊은 미소를 본 후 나는 그 앞의 나한 상의 포즈를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포즈로 나를 찍어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사진을 주로 찍지 나를 모델로 찍지는 않는데 말이지요. 평소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를 가장 많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런 나를 자비로운 미소로 바라보는 미륵보살은 누구일까요?

내 안엔 어떤 미래가 미소 짓고 있을까? 오래된 불상의 온화한 미소 앞에서 내면의 미래와 시선을 맞춰보았습니다.

 

차경의 미학, 자연을 품다 - 아라시야마 텐류지

 

빗자락이 가늘어지는 오후 텐류지로 이동했습니다. 텐류지는 1339년 무로마치 막부의 시조 아시카가 디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선종 사찰입니다. 선종 임제종의 텐류지파  본산지며 하늘의 용이라는 뜻으로 천상과 땅 사이를 오르내리는 깨달음의 존재를 상징합니다. 텐류지가 특별한 선종 사찰인 이유는 무소 소세키의 정원이 살아있는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정원사상상 가장 위대한 선사이자 정원가 무소 소세키가 조용한 사찰입니다. 그의 사상은 정원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수행 그 자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합니다. 텐류지의 정원은 '차경'이라 하여 자연을 끌어들여 마음의 구도를 짜는 방식으로 유명합니다. 산은 나의 뒷배경, 연못은  내 안의 감정, 그 사이를 걷는 나는 지금 무상을 가로지르는 한 사람입니다. 선종은 말과 경전보다 직관과 체험을 통해 깨닫는 불교입니다. 달마대사로부터 전해져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중시합니다. 핵심은 생각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 너머의 나를 만나는 것입니다. 텐류지에선 연못가에 앉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견성의 기회가 열릴 수 있다고 합니다. 대웅전 벽에 펼쳐진 거대한 용 그림은 하늘을 타고 내려오는 지혜와 직관의 형상입니다. 용의 눈은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나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착시를 주며 마치 당신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고 속삭이는 듯합니다. 선종의 깨달음은 용처럼 하늘을 타고 어느 순간 번쩍임으로 찾아옵니다. 텐류지를 걷는 지금 나는 내 안의 풍경을 보고 있는가? 말없이 전해지는 가르침은 내 마음에 어떻게 머무는가? 무소 소세키가 나를 위해 이 정원을 만들었다면 그는 나에게 어떤 질문을 던졌을까? 마음의 질문을 품고 연못에 가까이서도 먼 발치에서도 감상하였습니다. 보이는 것보다 느껴지는 것, 바람이 연못 위를 스치며 결을 만드는 모양을 느끼며 그 연못에 산을 품고 하늘을 끌어당겨 봅니다. 연못처럼 마음 한 가운데에 깨달음이 맑게 고입니다. 오전에 거쳐 온 사찰들의 느낌을 모두 풀어 놓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임제 스님도 그곳에 들어 있습니다. 

 

 

아라시야마의 오후는 바람 한 줄기조차 정원을 스치는 조화로운 순간들이 우주입니다. 그 안을 걸으며 소리를 보고 그림자를 듣고 바람을 마주하며 " 지금 여기 이 마음으로 머문다"고 선언하니 그 자체로 하나의 수행이자 풍경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깨달음은 조용하지만 그 파장은 아주 멀리 퍼집니다. 지금 이 감탄은 더 깊이 들어 갈 아라시야마의 대숲에도, 돌 위에 핀 이끼 위에도 조용히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지금 돌아 온 하루의 일상 횡단보도 나무 그늘, 자전거 주차장이 전혀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게이샤의 추억> 그리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 

 

교토에는 불교 사찰뿐이 아니라 신사도 많습니다. 교토는 일본 천황이 천도한 수도였던 곳이라 국가적 신성을 기리는 신사들이 곳곳에 세워졌고 동시에 불교 문화의 꽃이 활짝 핀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토는 일본 특유의 신부ㄹ혼합 전통이 가장 찬란하고 복잡하게 얽힌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신도는 자연물 자체를 신으로 섬기기 때문에 나무 한 그루, 바위 하나, 폭포 하나에도 카미의 영이 깃들어 있다고 믿습니다. 일본은 불교가 유입되기 전부터 신도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교가 들어오자 양쪽을 나누지 않고 공존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를 신불혼합이라고 부릅니다. 예전에는 많은 곳에서 신도 제례와 불교 법회가 함께 열리기도 했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분리되었습니다. 교토는 시간의 층위가 겹겹이 쌓인 도시입니다. 불교 사찰에선 무의 침묵을 만날 수 있고 신사에서 자연이라는 살아 있는 신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교토를 걷는것은 선의 길과 카미의 숨결을 함께 느끼는 자가 되는 것이지요. 일본 신사는 기복신앙의 한 형태입니다. 신사는 일본 전통 종교인 신도의 제단이자 공간입니다. 그안에는 카미 즉 자연의 신, 조상의 신, 수호신이 모셔져 있고 사람들은 그 카미에게 건강, 시험합격, 사업 번창, 순산 등 현세적 소원을 비는 곳입니다. 특히 신사에 가면 나무에 소원패를 매달고 운세를 뽑고 재앙을 막는 부적을 받는 것 이 모든 것이 한국 무속 신앙과 아주 닮았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도 있습니다. 일본의 신사는 국가 종교로 격상된 적이 있습니다. 특히 메이지 유신 이후 신도를 국교로 삼고 천황을 신격화하면서 신사 참배는 곧 국민의 의무이자 충성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신사는 "카미여 저를 지켜주세요" 한국 무속은 "어머니, 이 아픔 좀 거둬주세요" 땅이 달라 이름이 다를 뿐 그 안의 마음은 똑같이 빌고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여긴 것을 타국의 유사한 문화와 견주어 볼 때 비로소 그 깊이를 실감합니다. 그곳에서 보고 느낀 일본의 신사는 사실 우리 안의 무속신앙에 비춰보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너무 흔해서 지나쳤던 것들을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되는것입니다. 인도는 불교의 성지이지만 불자가 거의 없고 일본은 기복신앙의 나라이지만 불교를 소중히 여기는 불자들이 많았습니다. 불교는 시대와 땅에 따라 변해왔습니다. 인도는 부처님이 태어나고 설하고 입적하신 땅이지만 힌두교와의 융합, 이슬람의 침략, 민족정체성의 변화 등으로 불교는 중심에서 밀려났고 오늘날 인도에는 불교 성지만 있고 불자 수는 극히 적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중국은 수.당 시대 국가종교처럼 융성하다가 유교 중심 질서와 충돌 특히 혜능 이후 남종선의 생존 방식이 국가제도와 연결되며 종교로서보다는 철학과 수행으로 변화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 불교를 탄압하고 신도를 국교화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불교의 예술, 미학 선풍이 깊어졌고 일부 사찰은 공동체와 예술, 묵상과 죽음의 돌봄을 이어가는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불자라면 땅이 어디든, 껍질이 무엇디든, 그안에 담긴 불심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찰순례는 단지 관광이 아니라 그 시대의 불교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 있었는지 지금도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에 머물고 있는지 그 숨결의 흔적을 더듬는 순례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국경도 없고 종파도 언어도 시대도 초월한 마음의 길입니다. 그 길이 가끔은 무너지고 때로는 잊히고 어떤 땅에선 그림자처럼 남기도 하지만 누군가가 그것을 다시 찾아 걸을 때 그 자리가 곧 도량이 됩니다. 지금 일본 땅에서 사찰을 걷는 발끝 아래 부처님의 발자취도 함께 걷고 있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발자국을 찾아 기억해주는 마음이 곧 불자의 마음이니까요. 

 

게이샤의 추억 배경지 대숲과 신사

 

 

일상으로 돌아와 영화 <그랜드 투어>에서 언급했던 일본의 대한 부분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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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그랜드 투어>(2024.미겔 고메스)

2024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미겔 고메스의는 단지 하나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영화가 아닙니다. 이 작품은 시간과 공간, 현실과 허구, 감정과 형식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불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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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의 사찰 순례 경험이 영화<그랜드 투어>와 충돌하고, 다시 조율하는 내면의 성찰 과정에 놓여진 하루 그날처럼 비가 종일 내립니다. 쓰다 보니 막힌 건 단순히 영화 평론이 아니라 경험과 철학, 감정과 윤리 사이의 균형을 찾으려는 글쓰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랜드 투어는 이야기와 이미지, 역사와 현재, 현실과 픽션 사이를 끊임없이 흔들어 놓는 영화입니다. 전반부는 흑백 필름으로 구성된 1918년의 극적 허구가 펼쳐지고 후반부는 현대 아시아의 컬러 풍경이 삽입되며 두 시간대는 병치되지 않고 의도적으로 불일치하며 충돌합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불일치는 일본이라는 공간입니다. 주인공 에드워드는 오사카에서 선사와 문답을 나누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뒤를 쫒는 몰리의 여정에서는 일본이 누락됩니다. 고메즈 감독이 이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 사실을 찾을 수 없지만 그 생략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몰리가 일본을 지나치고 있다는 사실은 마치 감독이 제국주의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오늘의 일본을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판단은 편견이었습니다. 

교토 사찰 순례를 통해 직접 경험한 교토 속 일본은 제국의 잔재로만 환원되지 않았습니다. 오쿠노인에 묻힌 수많은 묘비와 쿠카이 대사와 同行二人으로 이어지는 길, 와비사비의 미학이 살아 숨 쉬는 엔코지와 난젠지, 황실의 별장이지만 무심한 듯 소박했던 텐쥬안, 그리고 금각사와 용안사에서 마주한 보이지 않음의 깨달음의 자취까지 그곳엔 불교를 깊이 성찰하고 지켜낸 일본 불자들의 삶과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랜드 투어> 속 오사카 선사 장면은 단순한 공간적 배경이 아니라 '선종'을 상징하는 사유의 장면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일본을 뜻했든, '선'을 하나의 동아시아적 사유로 품은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 영화는 일본을 지나치며 말하지 않음으로 말하고자 했던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영화를 비평하려다 나의 편견을 돌아보게 되었고 사찰을 걷다보니 영화를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감독은 시네마가 할 수 있는 모든 실험과 형태를 여행의 형식으로 구현했다고 말했지만 그 여정은 결국 관객의 사유 위에서만 완성되는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교토를 다녀온 지금에서야 그 여정의 결말 한 귀퉁이를 비로소 다시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고메즈 감독이 말하지 않고 말하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 영화는 제국주의가 남긴 상처와 흔적을 어떤 직접적인 고발이나 메시지 없이 보여줍니다. 흑백의 허구적 과거(1918)와 컬러의 현재(동남 아시아)의 병치를 통해 과거가 여전히 현재를 스며들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말합니다. 우리가 끝났다고 믿은 세계사적 상처는 여전히 관광의 이미지 뒤에 문명화된 현재의 표정 속에 고요히 잠복해 있다고 말입니다. 몰리는 아시아를 여행하지만 일본은 지나칩니다. 에드워드의 과거에는 일본이 등장합니다. 이 의도적 결핍은 감독이 일본의 제국주의적 과거에 대한 입장을 침묵으로 말하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일본은 그 침묵 속에서 오히려 가장 큰 존재로 남습니다. 감독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관객의 상상과 질문을 열어 둡니다. 여행이라는 장치는 원래 보고, 기록하고, 기억하는 자의 시선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그랜드 투어>는 누군가를 만나고 이해하기보다 지나치는 것, 놓치는 것, 기억이 어긋나는 것을 반복합니다. 이는 서구인이 동양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관광의 제스처 자체에 대한 비판적 재현입니다. 그래서 말하지 않고 말한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역사에 대한 침묵 속 고발, 재현의 불완전함, 기억의 취약함을 통한 관객의 자각 유도, 여정이 아닌 누락, 만남이 아닌 비껴감의 시네마 언어로 말해지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라는 철학적 제안입니다. <그랜드 투어>는 일본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일본을 가장 강하게 떠올리게 했으며 침묵은 공백이 아니라 질문이었고 누락은 무시가 아니라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라는 반문이었습니다. 나는 그 질문을 안고 교토 사찰을 걸었습니다. 일본이 제국주의를 청산하지 않은 나라라서 누락한게 아니라, 그 누락 자체를 통해 오히려 관객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비판의 회피가 아니라 감독 특유의 사유적 장치로서의 결핍입니다. 그렇다면 하필 왜 일본의 상징으로 선사의 장면이 선택되었을까? 젠(Zen)은 오늘날 일본의 정신문화를 대표하는 단어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세계적 관점에서 일본=Zen 이라는 문화적 환상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고메즈 감독은 이 정제되고 지혜로운 일본이라는 이미지 그 자체에 질문을 던졌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기억하는 일본은 정말 그 이미지 그대로인가요? 그 선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이 은폐되었는가요?" 선문답은 진리를 말하지 않고 찌르는 방식입니다. 선은 원래부터 말하지 않고 전하는 법문이지요. 고메즈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영화를 통해, ‘말하지 않고 깨우침을 던지는’ 선의 방식을 빌려온 셈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관객의 감상과 추론입니다. 그러나 왜 설득력 있는 해석인가하면 영화는 일부러 일본을 누락 시켰습니다. - 공백으로 말하려는 시도로 읽혀집니다. 선사라는 인물을 등장시키고 선문답처럼 의도를 명확히 말하지 않습니다. 영화의 구조 전체가 흑백 / 컬러, 과거 / 현재를 충돌시키며 진실을 흐르게 구성합니다. 이건 곧 진리를 직접 말하지 않고 사유하게 유도하는 구조입니다. 선문답이 바로 그러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선문답처럼 구성된 영화라고 보았습니다. 과거 에드워드의 여정에만 등장하는 선사는 일본이 세계에서 자기를 표현해온 대표적 문화 코드이자 과거의 지적 우월성과 정신적 고상함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현재의 몰리 여정에서는 지워버립니다. <그랜드 투어>는 일본을 부분적으로 혹은 기호처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직접 보고 걸으며 느낀 교토의 불교적 깊이와는 사뭇 다른 시선을 담고 있습니다. 내가 교토에서 본 일본은 금각사의 금빛 뒤에 감춰진 불교와 권력의 복잡한 역학, 용안사의 석정 앞, 다 보지 못함을 껴안는 겸손의 수행, 코류지의 반가사유상 앞, 말없이 베푸는 자비의 미소, 텐쥬안, 난젠지의 정원 속 와비사비의 미학과 황실의 소박함 이 모든 장면은 관광지로서의 일본이 아닌 정신의 깊이로 이어지는 수행자의 시선이었습니다. 반면 <그랜드 투어>는 일본을 서사적 연결고리 중 하나로만 배치했고 몰리의 여정에서 일본을 아예 생략함으로써 제국주의에 대한 메시지를 암시하려 했지만(개인적) 그 방식은 일본 내부의 다양한 층위, 특히 불교적 저항과 정신적 깊이는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랜드 투어>는 일본을 지나쳤지만 교토는 지나치기엔 너무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제국주의의 상징이 아닌 그 안에서도 불교를 지켜낸 사람들, 그들이 남긴 정원과 돌, 연못과 법문의 숨결을 보았습니다. 그건 오히려 일본 내에서 신사화 정책에 저항한 정신의 발자취였고 황금보다 고요한 수행의 흔적이었습니다. 교토에서 말 없는 스승처럼 전해온 정원과 미소는 영화가 말하지 못한 또 다른 일본을 보여주었습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진짜 불교의 숨결입니다. 

 

영화<게이샤의 추억>의 평론은 다시 보니 어쩌면 내 안의 두려움으로 마주하지 못하는 비판이 느껴졌습니다. 내가 겪지 않았지만 외할머니에게 들은 일제 시대 이야기, 교과서에서 배운 일제 침략에 대한 공포가 문장 속에 묻어났습니다. 마치 문장들이 서로 엉겨붙어 영화인지, 게이샤를 말하는지, 일본에 대한 비판인지 내가 읽어도 내가 쓴 글이라고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 평론이 영화 그 자체보다 일본에 집중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비판은 정당했을지도 모르지만, 다시 읽으니 내 문장 속에는 두려움이 숨어 있어 비판을 흐리게 하고 진실을 덜어냅니다. 게이샤의 본질, 그 문화와 상징이 말하는 여성을 바라보려 하기보다 외할머니에게 들은 전쟁의 기억, 침략의 그림자, 감정의 퇴적층을 먼저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비판은 영화보다 나라를 향했고 그 화살은 나의 무의식에서 왔습니다. 영화 평론은 대상을 똑바로 바라보는 일이지만 때로는 나의 눈을 먼저 들여다봐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감정이 아닌 사유로, 두려움이 아닌 관찰로 다시 문장을 시작합니다. 기억과 감정의 지층을 스스로 발굴해내는 고고학자 같은 작업입니다. 영화 <게이샤의 추억>이라는 하나의 문화 콘텐츠를 두고 비판적 이성으로 접근했다면 지금은 몸으로 걷고 눈으로 본 체험을 통해 그 인식의 무늬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쓰고 있습니다. 영화는 축축하고 어두운 여성의 일대기를 담담하게 헐리우드식 드라마 구조로 게이샤라는 존재를 둘러싼 사랑과 경쟁, 성공과 희생의 서사를 그려내었습니다. 완전 오리엔탈리즘의 동양 판타지 영화로 비판하기 좋은 영화였습니다. 헐리우드가 만들어낸 일본 게이샤는 예술가가 아니라 감정의 상품으로 소비되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런 문장을 스스로 써놓고 그 아래에서 안도했습니다. 나는 알고 있다고, 나는 비판적 시선을 가졌다고. 하지만 치우린 영화의 배경지 대나무숲을 걸어보고 영화를 다시 말하려니 부끄러워집니다. 게이샤의 본질이 어떤지, 일본의 전통이 실제로 어떤지 영화 속 장면으로 마치 다 아는것처럼 글을 썼습니다. 코끼리 다리를 만지면서 코끼리 전체를 다 아는듯이 말입니다. 실제 배경지를 마주하며 놀란건 20년도 넘은 영화의 배경지가 관광의 명소로 활용되고 있음입니다. 나름대로 이 전통을 어떻게 수용하고 해석하는지가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영화일뿐 평론 글쓰기 선생님 말씀이 스쳤습니다. 그 단순한 말이 와닿는 순간은 직접 배경지를 만났을 때 가능했습니다. <게이샤의 추억>이 오리엔탈리즘의 한계를 지닌 영화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시선 너머에 삶을 살아낸 사람들의 층위가 있었습니다. 내가 본 교토이었고 일본 문화의 복잡성이었습니다. 영화 한 편으로 한 나라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영화를 보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라는걸 글을 쓰는 순간에 잊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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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샤의 추억>(2005.롭 마셜)

2005년에 개봉한 영화 게이샤의 추억은 일본 교토의 전통문화인 ‘게이샤’를 배경으로 한 미국 헐리우드 작품입니다. 중국계 배우 장쯔이가 주인공 사유리 역을 맡았으며, 공리, 미셸 여오,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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