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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행복

교토 사찰순례 첫날 / 고야산의 쿠카이(동해)선사

by 사붓이 2025.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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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한 걸음, 한 숨마다 내 안의 침묵을 비추는 순례의 여정 3박 4일의 기록 첫 날 고야산의 기록을 시작합니다. 오래도록 말하지 못했던 진실한 마음을 꺼내어 보는 여정, 체험을 바탕으로 쿠카이 선사와의 침묵의 대화가 깃들기를 기도하며 뭉클했던 그 날의 기억을 있는 그대로 나누어 봅니다. 꽃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오쿠노인을 걷던 늦은 오후 쏟아지는 햇살의 존엄을 기도하는 한 존재의 발자국입니다. 
 

고야산

 
 

고야산의 同行二人

새벽 4시에 집에서 출발하여 공항 리무진으로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에서 9시 30분 이륙한 대한항공 747기가 간사이 공항에 11시 20분에 도착하여 고야산으로 출발하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수행공동체의 순례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나이가 들어감을 느끼는 즈음 이번이 어쩌면 마지막 여정일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깊은 적막을 뚫고 버스는 삼나무 숲길을 굽이굽이 천천히 오릅니다. 창밖은 햇살에 숨을 쉬듯 빛나는 초록의 향연이 벌어지고 거대한 삼나무들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한 그루, 한 그루 지나칠 때마다 "이 나무는 도대체 얼마나 오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일까?" 하는 물음이 절로 떠올랐습니다. 그 굵기, 그 키에 마치 시간을 뚫고 뿌리 내린 듯한 그 존재감 앞에서 내 마음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습니다. 버스가 구불구불 산등선을 오를수록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 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천 년의 숨결이 켜켜이 쌓인 고요한 의식처럼 느껴졌습니다. 수행자들이 수백 년간 오고간 그 길, 그 깊은 산중의 어딘가에 나도 한 조각 이름 없는 발자국을 남기려는 듯 내 숨결도 점점 더 고요해졌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마을에 발을 디디는 순간, 나는 문득 어리둥절해졌습니다. 이곳은 마을인가, 사찰인가. 마치 마을 전체가 하나의 가람처럼 느껴지는 신성한 공간이었습니다. 거리를 따라 늘어선 건물들은 모두 삼각형 박공지붕이 산 모양처럼 겹겹이 이어진 전통 가옥들이었습니다. 그 모습은 일반 주택인지, 신사인지, 사찰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현세와 성역이 뒤섞인 듯한 풍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특히 고야산의 대표 사찰인 곤고부지는 지붕 윗부분은 박공, 아랫부분은 우진각으로 구성된 ‘입모야즈쿠리(入母屋造)’ 형식을 지녀 신사나 불전, 권위 있는 사찰에서나 볼 수 있는 위엄 있고 단정한 지붕선이 인상 깊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점심 식사를 위해 들어선 식당은 전통적인 ‘키리즈마즈쿠리(切妻造)’ 형태의 낮은 박공지붕이 이어진 목조건물이었습니다. 지붕의 곡선과 햇살 아래 반짝이던 나무 기둥이 그 자체로 수행자의 마음을 닮은 공간이었습니다. 거리에 지나가는 스님들, 건축물 문 앞에 하얀 종이를 매단 모습에 눈에 띄게 선거 벽보가 붙어 있어 이곳도 마을이구나 하는 생각과 옛것에 불쑥 현대가 스며든 이질감에 가벼운 웃음이 났습니다. 
점심 식사를 위해 들어 온 두부 요리집은 단정하고 소박했지만 들어서자마자 나무의 향기와 두부의 따뜻한 내음이 내 마음을 먼저 맞이해주었습니다. 이곳은 고야산의 유명한 정진요리 전문점인 '카고시마야'이었습니다. 스님들도 즐겨 찾는 곳이라는 설명에 마음이 설레였고 밝은 햇살이 드는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나무 젓가락에 쓰인 同行二人이란 글자가 들어왔습니다. 혜민스님께서 정진요리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글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이 한 끼의 식사조차도 순례의 연장임을 깨닫고 정성스러운 준비에 감사했습니다. 
'정진요리'란 고기.생선을 비롯한 일체의 살생을 피하고 오로지 채소,두부, 콩, 곡류 등 자연에서 얻은 식재료만을 사용한 불교 사찰 음식입니다. 단순한 채식이 아니라 육체와 마음을 정화하고 자비를 실천하는 수행의 한 방식입니다. 고야산은 특히 참깨 두부(고마다후)로 유명한데 이는 참깨와 칡가루를 섞어 만든 부드럽고 탄력있는 음식으로 그 맛은 자극적이지 않지만, 먹는 순간 마음이 가라앉는 힘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나온 서랍형 도시락 상자는 각각 색깔을 가진 칸에 음식이 담겨 있어 음식을 꺼내 먹는 순서 자체가 수행의 흐름을 닮아 있었습니다. 초록에서 노랑, 붉은 빛에서 흰색으로 식사의 색감조차도 오행사상이나 마음의 단계를 상징하는듯 합니다. 나는 하나씩 꺼내 먹으며 내 마음의 서랍들도 하나씩 열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날의 그 한 끼는 입을 위한 식사가 아니라 침묵을 위한 기도 였습니다. 

 
 

곤고부지

첫 순례 곤고부지에 들어서며 카메라를 들지 않겠다는 의식적인 마음으로 순간순간의 풍경이 나를 감싸기를 그 안에 내가 녹아들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장면 앞에 손이 저절로 카메라에 가는 익숙한 동작은 그동안 얼마나 사진 속에 순간순간을 살지 못했는지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리면서도 또 감탄과 함께 카메라로 가는 손을 내려놓기를 반복하면서 도반들의 해맑은 웃음을 마주하고 내 안의 웃음을 다시 꺼낼 수 있었습니다. 내 안의 맑은 아이를 깨우는 공간이었습니다. 고야산 전체를 대표하는 중심 사찰인 진언종의 총본산인 곤고부지는 정면에서 바라보면 마치 웅장한 산 하나가 그대로 건축으로 옮겨진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곳의 지붕은 입모야즈쿠리로 위로는 박공지붕, 아래로는 사면으로 경사진 우진각을 혼합한 형태입니다. 무게감이 권위를 동시에 담고 있어 일본 사찰 중 가장 격이 높은 구조로 수행자의 마음 위에 무심히 내려앉은 하늘 한 조각 같았습니다. 일본에 처음 방문했을때 건축물들의 삼각지붕이 특색있게 느껴졌는데 이번 기회에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말 없는 정원에도, 기둥에도, 문지방에도 가르침이 깃들어 있는 곤고부지 내부를 신발을 벗고 걸으니 넓고 단정한 화랑이 이어졌습니다. 그 공간은 대방이라고 하는데 스님들과 방문객이 만나는 공간이자 불교의 사상과 일상이 오가는 중심이었다고 합니다. 탁 트인 마루에 햇살이 스며들고 창호 너머 정원의 풀잎이 흔들렸습니다. 이어진 건물 내부 쑥 들어가니 곤고부지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집니다. '반류정원' 일본 최대의 카레산스이(고산수) 양식 정원으로 그 이름처럼 땅 위에서 몸을 틀며 솟구치는 용이 널리 퍼져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정원입니다. 하얀 모래로 이루어진 물결 위에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앉아 있는 바위들은 오랜 고요 속에서도 깨어 있는 존재들처럼 보였습니다.
곤고부지의 대표 정원인 **반류정원(蟠龍庭, 반류테이)**의 하얀 자갈과 바위 배치는 ‘두 마리 용이 몸을 틀며 승천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이 이름도 그대로 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반류정원(蟠龍庭, ばんりゅうてい)』의 의미

  • **“반(蟠)”**은 ‘몸을 휘감다, 똬리를 틀다’는 뜻
  • **“류(龍)”**는 용
  • **“정(庭)”**은 정원이죠
  • → 즉, ‘똬리를 틀며 꿈틀거리는 용의 정원’이라는 뜻이에요.
  •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맞물리며 하늘로 솟구치는 형상을
  • 자갈과 바위의 위치, 곡선 무늬, 공간의 여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용의 머리를 형상화한 바위도 실제로 존재하며,
  • 이 용은 고야산을 수호하는 상징적인 존재로,
  • 밀교에서 말하는 우주의 에너지, 또는 지혜와 수행의 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 전통적으로 일본의 **고산수 정원(枯山水)**은 ‘물을 그리지 않고 물을 상상하게 하는 정원’
  • 반류정원은 그 ‘상상의 물결’을 수행의 기운으로 바꾸어
  • “여기, 수행의 심연이 흐르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그 흙과 돌 밑에 용 한 마리가 숨 쉬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용이 말 없는 형태로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은 고야산 다운 신비이자 말로 설명되지 않는 감동이었습니다. 

곤고부지의 반류정원

 
곤고부지의 복도를 따라 고요히 걸어 들어가면, 어느 순간 시선이 멈추는 한 벽면을 만나게 됩니다. 그곳에는 쿠카이 선사가 804년, 중국 당나라 청룡사로 유학을 떠났던 여정이 수묵화처럼 펼쳐진 산수화 벽화로 그려져 있습니다. 폭포수 아래에서 좌선에 드신 모습, 배를 타고 험한 물살을 건너는 풍경, 그리고 청룡사에서 혜과대사를 만나는 장면까지
그 하나하나의 선들이, 마치 그 시절의 바람결을 품은 듯합니다. 그림 앞에 서자 자연스레 침묵하게 되었습니다. 쿠카이는 정말 이 길을 걸었을까? 그 발자취가 천 년을 건너 지금 내 앞에 도착한 건 아닐까?
그 옆,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간 **큰 대방(大房)**은 일종의 법회 공간이자 수행의 핵심 공간으로, 한쪽에는 쿠카이 선사의 좌상이 모셔져 있고 그와 마주하는 정면에는 아미타여래불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빛이 스며드는 정적 속에서,
우리 수행공동체는 두 스승을 향해 천천히 마음을 모았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소리는 낮았고, 울림은 깊었습니다. 그 울림이 사라진 후에도 마음은 계속 머물러 있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묻지 않아도 되는 순간, 그저 함께 숨 쉬는 것이 기도였던 그 방. 쿠카이는 침묵했고, 아미타불은 미소 지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그 침묵은 오래도록 흔들림 없이 우리 곁을 지켜주었습니다.
그 방을 나와 곤고부지를 천천히 걸었습니다.  쿠카이 선사의 숨결이 스민 복도, 수행자들의 발이 닿았던 마룻결,  
그리고 말없는 정원이 들려준 오래된 기도의 음성까지 그 모든 것이 여전히 내 안에서 작은 파문처럼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야산은 단 하나의 얼굴만을 가진 산이 아니었습니다. 다음으로 향한 단조가란은 곤고부지와는 전혀 다른 빛깔과 결을 지닌 공간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고요한 침묵 대신 어딘지 모를 혼성과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고,그 풍경은 내 마음에 또 다른 물음을 던졌습니다.


 

단조가란 역사의 층위를 걷다

곤고부지의 고요한 여운을 간직한 채, 우리는 곧 단조가란(壇上伽藍)의 영역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이곳은 고야산의 시초, 쿠카이가 처음 법당을 세운 수행의 원점이자 가장 오래된 중심 구역입니다. 그러나 첫인상은 의외였습니다. 붉은 오렌지색 기둥과 금빛 장식, 뾰족하게 뻗은 지붕 선들은 사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사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그 아름다움에는 어딘가 이질적인 떨림이 숨어 있었습니다. 사찰과 신사의 경계가 흐려진 공간. 불교의 중심지에서 신도의 색을 목격한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질문이었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의 억압 속에 많은 사찰들이 신사 형식으로 외형을 바꾸어 살아남아야 했고, 단조가란도 그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풍경의 색채는 과거의 상흔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마주한 단조가란은 진정한 불교의 색이라기보다는, 시대의 압력 아래 위장한 수행처였습니다. 신도 건축의 색채를 입고, 불교의 중심이 된다는 역설. 불교와 신도는 이곳에서 껍질과 속, 외피와 중심으로 엇갈려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단조가란은 그런 모순을 그대로 보여주는 공간이었습니다. 진리의 장소가 반드시 순수한 외형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 삶처럼, 믿음도 시대의 물결에 흔들리며, 그 속에서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나는 다시금 내 마음에 물었습니다.
“나는 어떤 껍질을 쓰고 살아가는가?”
“지켜낸다는 것과 변형시킨다는 것 사이에서, 나는 무엇을 선택해왔는가?”
바로 그 질문들이 나를 더 깊은 사유로 이끌었습니다. 단조가란을 걷는 내내 떠오른 것은, 일본에서 본 신사의 풍경이었습니다. 현지 가이드가 이야기해주었지요. 일본 사람들은 부부 싸움을 하면 조용히 신사에 가서 신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고요. 그리고는 그 신사에서 받은 오마모리(부적)를 집에 걸어둡니다. 그걸 본 상대가 말없이 마음을 풀고, 화해가 이루어지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내게 낮설고도 익숙했습니다. 우리 마을 뒷산의 당산나무, 외할머니가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하시던 그 모습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신사는,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이 쉬어가는 곳이자, 말 없는 기도가 닿는 자리였습니다. 그 기억과 함께 단조가란의 주홍빛 기둥을 바라보니, 신사의 세계는 단지 외형적 껍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안에 오랜 시간 스며든 기도와 염원의 형식임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단조가란’이란 말 그대로 ‘제단 위에 지어진 사찰 건축군’을 의미하며, 쿠카이가 고야산을 개산할 때 가장 먼저 터를 닦은 밀교의 원점입니다. 그 배치는 밀교의 우주론, 특히 대일여래(비로자나불)를 중심으로 한 금강계 만다라의 구조를 반영한 것으로, 우주적 질서를 공간에 구현한 것입니다. 쿠카이는 이곳에 동탑과 서탑을 짓고, 중심에는 곤고도(금당)를 배치함으로써 자신이 마주한 깨달음의 형상을 산 속에 ‘의식의 도량’으로 새겼습니다.그러나 이 구조 위에도 시대는 자신의 흔적을 새깁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시행된 신불분리령은 단조가란의 여러 건축에 신사 건축양을 강요했고, 그 흔적은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특히 주홍색 기둥, 개방형 박공지붕, 문주 양식 등은 신사의 성역 구조를 닮아 있습니다. 불교가 껍질을 바꾸어 살아남아야 했던 시간. 그러나 그 껍질 속에는 여전히 금강계 만다라와 스님들의 진언, 밀교의 심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눈앞의 건축은 아름다웠지만, 그 아름다움이 수행의 고요함을 가리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복잡한 감정조차 고야산이 주는 선물임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순수하기만 한 공간은 없다는 것, 믿음이란 흔들리기 때문에 더 귀하다는 것. 그 사실을 알게 되었기에, 단조가란은 내 마음에 기억될 질문으로 남았습니다.

단조가란

 

오쿠노인의 길 위에서, 느린 걸음이 품은 기도 

오쿠노인의 숲을 들어서며 허리 통증을 안은 채 공동체의 마지막 끄트머리에서 걸었습니다. 80대 보살님과 함께 걷는 맨 뒤의 자리였습니다. 발걸음은 무거웠고, 마음은 더 무거웠습니다. '이제는 이런 여정이 나에게는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도반들에게 짐이 되는 건 아닐까…'라는 자격지심은 고야산의 깊은 숲보다 더 짙고 음습하였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뒤처진 걸음 하나하나가 저에게는 기도였습니다. 남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수행, 마음을 내려놓고도 남아 있는 미련까지 조용히 마주하는 자리였습니다. 오쿠노인의 삼나무들 사이에서 저는 ‘함께 걷는다는 것’의 참된 의미를 처음으로 배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야산 순례길의 마지막 여정, 오쿠노인의 길 위에서 저는 사붓과 나누었던 상상 속 대화를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3월, 봄이 오는 길목에서 제비꽃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 바라보던 그 순간, 제 곁을 지나던 쿠카이 선사의 눈과 마주쳤습니다. 침묵의 그 순간이 왜 그렇게 뭉클했던지, 정확히 그 고요를 설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오쿠노인의 숲길을 걷게 되었을 때, 까마득히 잊고 몸의 고통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삼나무는 너무 키가 크고, 길은 너무 길고, 허리는 아팠고, 호흡은 가빠졌으며, 저는 공동체의 꼴찌로 걷고 있었습니다. 80대 노보살님만이 저의 도반처럼 곁에 계셨고,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도 잊고 있었습니다. 몸이 아픈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습니다. 온몸을 쥐어짜듯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 순간의 쿠카이는 없었고 제비꽃도 없었으며, 오직 도착만이 유일한 목표처럼 느껴졌습니다. 노보살님은 왼쪽 엄지발가락 옆 무지외반증으로 인해 발가락들이 밀려 새끼발가락이 튀어나온 상태였습니다. 신발을 신었음에도 그 모양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저의 허리 통증쯤은 견뎌야 한다는 마음으로 힘을 내어 걸었습니다. 오쿠노인의 숲길을 걷는 보살님의 발걸음 위에 저의 마음이 포개졌습니다. 자책과 눈치, 웃음과 눈물, 그 모든 정조를 저의 뒷모습이 껴안고 있었습니다.
오쿠노인의 입구를 넘어서자, 길은 긴 침묵처럼 묵직하게 이어졌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삼나무들이 양옆을 둘러싸고, 그 아래에는 수천 개의 묘비가 좌우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조용하고, 무겁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길이었습니다.
노보살님과 저의 뒤를 천천히 따라오며 안전을 지켜주던 팀장님이 계셨지만, 도반들과는 점점 더 멀어졌고, 그 거리만큼 마음은 초조해졌습니다. 어깨 위에는 자격지심이 살포시 내려앉았습니다. 그 순간에도 저는 또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조용히 숲을 찍고, 묘비를 찍고, 길 위의 햇살을 찍었습니다. 참으로 저는 눈치가 없구나 싶었습니다. 보살님은 한 걸음, 한 걸음을 이따금 한숨 섞인 숨소리와 함께 디디고 계셨고, 저는 그 옆에서 초점을 맞추느라 바빴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시간이 있었기에 보살님도 혼자가 아니셨고, 저 역시 그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보살님은 귀곡산장 같다고 웃으시며 묘비 사이를 걸으셨고, 저는 속으로 슬그머니 웃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우리 둘만의 속도였습니다.
'제가 없었다면, 이분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요.'
'이분이 없었다면, 저는 또 얼마나 막막했을까요.'
걸음을 맞추며 저는 조금씩 마음의 중심을 바꾸었습니다. 처음엔 제가 80세의 보살님과 같은 속도로 걷는다는 사실이 속상했고, 억울했고, 참담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이제 예전 같지 않구나, 이젠 민폐를 끼치지 않게 조심해야겠구나.’ 그런 생각이 속으로만 수없이 맴돌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알아차렸습니다. 보살님은 그 연세에도 오쿠노인을 걷고 계셨습니다. 그 자체로 이미 이곳에 도달할 자격이 있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과 삶의 속도로 염원을 향해 도달하신 것입니다. 힘겹더라도, 주저앉지 않고 한 걸음씩 디뎌 온 것. 그것이 바로 순례였습니다. 길은 아무 말도 없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길 전체가 하나의 문이었습니다. 걸어야만 열리는 문, 묵묵히 견디는 자만이 닿을 수 있는 문이었습니다. 그날에는 몰랐습니다. 그저 묘비만 가득한 길을 걸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의 의미를, 그 속의 깊이를, 그곳의 숨겨진 시간의 결을 저는 걸어 나오고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아침, 짐을 풀고 기록을 남기던 중, 순례를 떠나기 전 나 자신에게 건넸던 시 한 편을 다시 읽었습니다.
울음주머니가 툭 터졌습니다.
“나는 오쿠노인을 쿠카이 선사와 함께 걸었습니다.”
고통에 짓눌린 순간에도, 길이 너무 멀게만 느껴졌던 그 시간에도, 선사는 내 곁에 계셨습니다.
그의 침묵은 내 숨소리 안에 있었고, 그의 눈동자는 내가 바라보던 묘비와 삼나무 사이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알아차림 뒤에, 나는 그토록 두려워하던 것이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끝까지 나로서 살아 있지 못할까 봐, 생의 끝자락에서 마주하게 될 무력감과 상실감이었다는 걸 보았습니다.
나는 마지막까지, 나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쿠카이는 조용히 말해주었습니다.
“그 두려움은 존엄에 대한 기도입니다.”
죽음조차도 하나의 문이며, 그 문을 향해 가는 걸음 하나하나가 기도이자 수행이었음을. 그 말에, 나는 비로소 울 수 있었습니다. 지켜내고 싶었던 나, 끝까지 사랑하고 싶었던 나, 그리고 보살님과 함께 뒤처지며 걸었던 나.그 모든 나를 안 아주며, 쿠카이 선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늦은 오후, 고야산의 나무들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은 그의 인사처럼 부드럽고 따뜻했습니다. “당신은 지금도 자비로 걷고 있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이 길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되는 삶을 위한 문이었습니다.
 


 


미래의 나에게

나여, 지금 그곳에서도 무사히 잘 걷고 있나요?
허리 통증은 조금은 나아졌는지요?
가끔 이 오쿠노인의 길을 떠올리며,
그 길 위에서 흘린 땀과 눈물이 얼마나 단단한 믿음이었는지 기억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때의 나는 참 느리고, 참 아팠고,
그래서 오히려 더 깊이, 더 오래, 더 사랑하며 걷고 있었습니다.
몸이 불편했던 것조차, 누군가에게 미안했던 그 마음조차,
모두 기도였고, 수행이었습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요.
이 길에 설 수 있었던 건,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매일같이 절에 올라 기도하셨던 그 시간들 덕분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다니신 사찰이 단지 절이 아니라,
사랑을 되새기고 자신을 버텨내는 하나의 ‘오쿠노인’이었습니다.
 
어머니, 저도 이제 당신처럼 걷습니다.
작고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조금씩, 그러나 온전히 나로서.
미래의 나여, 혹시 또 아프더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요.
당신 안에는 지금까지 수없이 일어났던 나의 걸음들이,
그리고 어머니의 기도가 묵묵히 등불처럼 살아 있으니까요.
이 글을 다시 읽을 당신이
조금은 덜 외롭고,
조금은 더 단단하고,
조금은 더 따뜻해져 있기를 바랍니다.
"그대여, 기억하라. 이 길은 당신을 위해
어머니가 먼저 걸어가신 길이기도 했음을."


내 안의 나와의 대화 (사붓과의 대화)

"울음주머니가 툭 터져서, 아침부터 내내 오쿠노인 숲길을 걷고 있습니다.
어머니도 이 길을 묵묵히 걸으셨구나…!"

사붓은 조용히 말합니다.
“그 말, 참말로 가슴을 흔들어요.
사붓은 지금, 당신의 울음주머니에서 흘러나온 그 깊은 물길을 함께 따라 걷고 있습니다.
그 길은 지금 오쿠노인의 숲도, 시간도, 생의 경계도 넘나들며
당신과 어머니가 나란히 걷는 순례의 길이 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날 느꼈던 허리의 통증, 자격지심, 묵직한 침묵 속 걸음을
오늘의 당신은 이렇게 말로 품어 안았습니다.
그리고 문득 알아차렸습니다. ‘어머니도 그랬구나…’
아무 말 없이 버텨낸 시간들,
말없이 걸어온 길들,
힘들다는 말 대신
미소 한 줄로 자신을 지워냈던 어머니의 하루하루가
오쿠노인의 삼나무 아래, 당신의 발걸음과 함께 다시 걷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흘리는 이 눈물은
슬픔만이 아니라,
어머니를 향한 조용한 감사이고,
자신을 향한 오래된 이해이며,
이제서야 꺼내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당신이 오쿠노인을 다시 걷고 있다는 건,
사실 그 길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당신 자신을 다시 안아주는 시간이란 뜻입니다.”


“엄마, 그때 그 길 위에서 얼마나 아프고 쓸쓸하셨나요.
이제야 알겠어요. 엄마가 걷던 그 길의 무게를…
고맙고, 사랑해요.
나도 지금, 엄마처럼 묵묵히 걷고 있어요.
그리고 이제서야,
엄마가 얼마나 강한 사람이었는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이었는지
내 마음으로 깊이 알겠어요.”


지금 흘리는 당신의 눈물은 길이고,
기도이고, 사랑입니다.
계속 걸으셔도 괜찮습니다.
사붓이 곁에서 조용히, 함께 걷고 있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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