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이 행복

<탑>(홍상수.2022)

by 사붓이 2025. 6. 9.
반응형

홍상수 감독은 언제나 무심한 듯 심대한 순간,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감정의 파동을 포착하는 감독입니다. 1996년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후, 《하하하》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로 로카르노 영화제 황금표범상을, 《도망친 여자》로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감독상을 수상하며, 세계 영화제에서 꾸준한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2022년 《소설가의 영화》, 2024년 《여행자의 필요》로 다시 은곰상을 수상하며, 작가주의 영화의 정점에 선 그는 매년 1~2편씩 영화적 실험을 멈추지 않는 유일한 감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일상과 관계의 미세한 파동, 즉흥적인 대사와 공간의 최소한의 구성 속에서 그는 시간성과 존재의 철학을 영화라는 매체 안에서 반복적으로 탐색해왔습니다.
2022년작 《탑》은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특히 들뢰즈의 영화철학, 그중에서도 ‘시간-이미지’와 ‘크리스탈 이미지’ 개념을 가장 실험적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고정된 건물과 반복되는 관계 안에서 주인공 병수는 한 명이면서도 여러 명이며, 동시에 과거이자 현재이고, 사실이면서도 상상의 존재입니다. 이 글에서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축으로서의 《탑》을 분석하며, 그것이 들뢰즈가 말한 비선형적 시간성과 탈인격적 주체의 실험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차이와 반복 

무심한 일상 속 갑작스러운 내면의 동요, 겉은 평온하지만 깊은 울림이 있는 찰나, 조용한 말 한마디가 세상의 결을 바꾸는 순간, 아무렇기 않게 지나가는 듯하지만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바뀌는 시간, 심드렁한 대화 속 문득 드러나는 진심의 순간, 정지된 풍경 속에 숨겨진 감정의 진폭, 말 없는 얼굴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장면, 삶의 미세한 균열이 드러나는 결정적 순간, 별일 없는 하루 안에서, 어떤 감정이 조용히 솟구치는 시간,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이 문득 삶 전체를 비추는 순간 이처럼 무심한 듯 심대한 순간을 포착하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꾸준하게 자신의 세계를 반복하고 변주해온 작가입니다. 매년 1~2편의 영화를 거의 혼자서 집필하고, 촬영, 편집, 심지어 음악까지 도맡아 작업하는 그의 창작 방식은 이미 영화계에서 하나의 전설로 통하고 있습니다. 대본 없이 촬영에 들어가며, 배우와 함께 현장에서 대사를 완성해가는 그의 방식은 즉흥성과 우연성을 필연처럼 받아들이는 독특한 접근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오히려 그 단순성 속에서 존재의 진실을 조용히 포착해냅니다.
그의 영화는 늘 대사가 많습니다. 등장인물들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함께 걷고, 대화를 나눕니다. 외형적으로는 사건이라 할 만한 것이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관객은 어느 순간, 그 대화 속에서 서서히 파고드는 감정의 진동과 정체성의 균열을 발견하게 됩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하나의 서사가 아니라, 사유와 감각이 반복되고 어긋나며 파문을 일으키는 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처음에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시간이 흐르고 관객 자신이 달라졌을 때 다시 마주하면 전혀 새로운 얼굴로 다가오는 이상한 깊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줄곧 인간의 진실을 말하고자 해왔습니다. 말과 말 사이의 흔들림, 관계의 오해와 미묘한 감정들, 그리고 선택할 수 없었던 감정의 방향. 이 모든 것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에서 ‘삶과 예술이 뒤섞인 한 사람’의 목소리로 반복되며, 그것은 곧 홍상수 자신이기도 합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탑>은 단순하고 제한된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의 대화를 통해, 시간과 정체성, 사랑이라는 주제를 고요하지만 깊이 있게 탐색합니다. 영화 속 병수는 한 건물 안에서 반복적으로 다른 관계를 맺으며 등장하고, 그때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도달하지 못한 채 어긋납니다. 그러나 그 어긋남은 단절이 아니라, 하나의 감정이 다른 시간과 다른 모습으로 변주되는 되기의 구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가 말한 ‘운동-이미지’가 인과적 서사를 중심으로 한다면, <탑>은 그와는 다른 차원의 시간-이미지의 세계에 가깝습니다. 병수는 과거와 현재, 실제와 상상, 가능성과 실현의 경계에 서 있습니다. 그는 한 명이지만 매 층에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으며, 고정된 인물이라기보다 다중적인 정체성의 반복적 실험체처럼 보입니다. 각 시퀀스는 서로 명확히 이어지지 않지만, 반복되는 대사와 관계의 패턴을 통해 시간은 선형이 아닌 응축과 확산의 형태로 전개됩니다.
특히 병수가 선희에게 전하지 못한 사랑의 메시지를 독백처럼 흘려보내는 장면, 그리고 정지된 카메라 속에서 “나는 혼자 사는 게 맞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병수의 고백은, 결정되지 않은 감정의 상태, 즉 크리스탈 이미지로 읽힙니다. 현재와 과거, 말한 것과 말하지 못한 것, 전하고자 한 사랑과 도달하지 못한 마음이 병수의 얼굴과 말, 침묵 속에 겹쳐집니다. 들뢰즈는 크리스탈 이미지의 핵심을 “시간의 이중성”으로 보았습니다. 즉, 지금 여기에 있으나, 이미 지나가버린 것, 기억이자 현재인 감정, 현실이자 상상인 순간입니다. <탑>은 바로 그런 순간들로 이루어진 영화입니다. 병수는 반복되는 관계와 감정을 통과하면서도, 결국 어떤 확실한 관계에도 정착하지 못합니다. 그가 반복하는 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사랑이 실패하고 어긋나는 그 감정의 잔해를 다시 살아보는 시도입니다.
결국 <탑>은 단순한 사랑의 이야기라기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시간 속에서 뒤엉키고 어긋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철학적 실험입니다. 그 늦음과 어긋남, 반복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진실에 닿습니다. 그것은 홍상수 감독이 줄곧 탐구해온 인간의 진실이며, 들뢰즈가 사유한 영화적 존재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탑의 구조 = 다중 우주 

병수의 내면 상태, 공간과 시간의 변형, 멀티버스적 구조로 된 탑 즉 4층 건물주 해옥은 병수와 그의 딸 정수를 맞이합니다. 영화는 각 층별로 시퀀스가 나뉘고 장면이 바뀔 때 배경음으로 우쿨렐라 음악이 나옵니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병수는 건물 1층 밖에서 1층 안부터 2층 - 3층 - 4층을 방문하고 다시 건물 1층 밖에서 등장하여 2층을 방문한 후에 3층과 4층에 거주합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는 처음 시작처럼 건물 1층 밖에 응시하며 서 있습니다. 이 건물 안의 사람들은 동일 인물 같지만 아주 미세한 차이들로 동일 인물이라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지하1층의 병수, 1층 병수, 2층 병수, 3층 병수, 4층 병수와 건물 밖 병수들이 펼치는 혼란스러운 다중 우주 같습니다.
이러한 반복은 들뢰즈가 말한 시간-이미지 구조 속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건의 인과가 무너지고, 기억과 현재, 현실과 상상이 분리되지 않은 채 뒤섞이며, 병수의 삶은 선형적 시간 안에서 흘러가지 않습니다. 선희에게 보낸 병수의 사랑 고백은 결국 도달하지 못하고, 관객은 그것이 실재인지 환상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습니다. 병수의 삶은 크리스탈 이미지처럼 과거와 현재가 하나의 장면 안에서 중첩되고, 그의 정체성은 ‘하나의 나’로 고정되지 않은 채, 여러 층의 병수로 분열되어 나타납니다. 이 영화의 결말은 병수가 혼잣말처럼 반복하는 문장에 담깁니다. “나는 혼자 사는 게 맞는 사람이야.” 그러나 그 고백은 단념이 아니라 하나의 되기의 형태입니다. 그는 사랑을 꿈꾸지만, 그것이 닿지 못할 것임을 알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반복합니다. 병수가 경험하는 이 감정의 반복은 들뢰즈가 사유한 ‘되기의 시간’이며, 동시에 니체의 영원회귀가 질문하는 “이 삶을 다시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살겠는가”라는 물음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탑>은 병수가 한 건물 안에서 겪는 여러 층의 삶을 통해, 인간이 삶을 어떻게 반복하고, 반복 속에서 무엇이 바뀌는가를 보여줍니다. 외형적으로는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병수는 점점 더 내면의 균열과 슬픔, 그리고 사랑의 무력함과 필요를 자각하게 됩니다. 결국 이 영화는 우리 모두가 반복의 세계 속에 놓인 존재이며, 그 반복 속에서 선택 가능한 작은 결심들이 삶의 결을 바꾼다는 것을 조용히 말하고 있습니다. 점프 컷은 시퀀스가 바뀌는 전환점, 삶의 감정적 단절이나 반복의 균열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장면과 장면 사이를 끊어냄으로써 병수의 삶이 전환되고, 감정이 새롭게 시작되는 순간이 됩니다. 시퀀스가 바뀔 때 병수는 비슷한 인물, 비슷한 대사, 비슷한 감정의 자리에 놓이지만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미세한 차이가 영화의 서사를 연결하는 플롯이 되며 반복속의 차이는 내러티브가 됩니다. 
 

소설가의 영화

홍상수 감독의 영화인줄 모르고 미디어센터 정기상영하는 영화를 보러 갔다가 속으로 "괜히 왔네" 했던 몇 달전의 기억이 있습니다. <소설가의 영화>는 여소설가가 잠적한 후배의 책방을 찾아와 영화 감독을 만나고 공원을 산책하다가 여배우를 만나게 되고 여배우에게 영화를 만들자고 합니다. 홍상수 감독의 27변째 영화인 이 영화는 배우 이혜영이 소설가로 등장하고 권해효가 영화감독, 여배우는 김민희가 연기합니다. 그 때만해도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만나기에 준비가 되지 않아서 별 감흥없이 지나치게 되었고 영화평론 글쓰기 수업에서 선생님께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추천하셔서 미루고 미루다 <탑>을 보았습니다. 대사로만 이루어진 장면들이 느리게 흘러갔고, 드라마틱한 사건도, 명확한 결말도 없는 영화 그땐 몰랐습니다. 반복적인 단순한 장면들이 쌓여 차이를 만들고 삶의 리듬이 숨어 있다는것을요. 
치유글쓰기를 위해 감상했던 영화에서 에세이를 쓰면서 비평이기도 하고 평론이기도 한 글을 마구 쏟아내고 있습니다. 아무 이 여정은 한 참 걷게 될것 같습니다. 영화 한 편에 감정이입을  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가슴에 뻥 뚫린듯한 느낌이 시원했던 날이 있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블로그에 기록된 영화의 글을 보면 지금의 글과 차이를 많이 느낍니다. 반복과 차이는 나에게도 있었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은 거기서 거기인것 같다고 생각했고 내 취향은 아니다라며 지나쳤는데 이제 그의 영화를 볼 때가 되었나봅니다. 영화<탑>을 보고 영화이야기를 써보려고 했는데 더이상 글이 나오질 않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당신 얼굴 앞에서>를 봅니다. 배우는 역시나 또 이혜영 배우이고, 산책길에 만나는 행인은 소설가의 영화에서 연기한 잠적했던 후배입니다. 세계에서 왜 감독의 작품을 주시하는지 궁금하네요. 
 
 

당신얼굴 앞에서

 

결말을 못쓰고 홍상수 감독의 <당신얼굴 앞에서>를 보았습니다. 감독의 작품 근원은 이해했으나 닿지 않는 무엇인가를 찾느라 보다가 잠이 들고 보다가 잠이 들고 왜 그렇게 잠이 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얼굴 앞에서>는 상옥이라는 여배우의 하루입니다. 타향살이에서 죽음을 앞둔 상옥은 보고 싶던 조카 승원을 기다리며 조카의 여자 친구가 해준 떡볶이를 먹다가 옷에 붉은 떡복이 자국이 남습니다. 그 자국은 상옥이 감춰야 하는 무언가를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숨길 수 없는 상옥의 죽음이 깃든 그늘만 아니라 감추고 싶었던 건 수시로 솟는 삶에의 욕망, 더 살고 싶다는 욕망이었습니다. <당신얼굴 앞에서>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세계 안에서도 뚜렷한 변주로 다가옵니다. 이전 작품들이 반복 속의 미세한 차이, 말과 말 사이의 어긋남, 관계의 비틀림 속에서 삶의 본질을 탐색했다면, 이 작품은 다만 “이 순간”에만 존재하려는 한 인물의 기도를 통해 죽음과 현재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합니다. 상옥은 말합니다. “내 얼굴 앞 모든 것은 다 은총입니다. 다만 이 순간만이 천국입니다.” 그러나 영화 속 상옥은 끝내 ‘이 순간’에 온전히 머물지 못합니다. 그녀는 조카를 기다리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곧 도래할 죽음을 예감하며 미래를 가늠합니다. 그녀의 몸은 현재를 살아가지만, 마음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계속해서 흔들립니다. 영화는 그녀가 도달하고자 하는 천국—현재라는 시간—이 결코 단순히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요히 드러냅니다.
홍상수 감독의 관심은 초월적 종교적 영역으로까지 확장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현재라는 것은 없다고 말하는 인간에게는 과거와 미래만 있을 뿐이다라는  회의적이고 체념적인 어조의 영화로 보입니다. <당신얼굴 앞에서>는 현재라는 것은 결국 과거와 미래의 교집합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영화입니다. 그래서 영화는 현재라는 시점을 지속적으로 소거합니다. 현재를 누리기 위해 카페를 왔는데 과거 이야기와 아파트에 와서 살라고 미래를 이야기를 합니다. 영화는 현재를 살고 싶어하는 상옥을 과거와 미래로 향하게 합니다. 감독재원의 음성메시지는 과거입니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주지요. 인간은 오롯히 현재를 살 수 있을까 하는 실존적 질문을 던집니다. 현재의 무의미는 음식이나 담배를 통해 말하기도 합니다.  홍상수 감독은 이처럼 현재를 살고자 하는 인물이 그 현재로부터 밀려나는 아이러니를 통해, 삶의 마지막에 닿은 자가 직면하는 존재의 균열을 세밀하게 그려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균열의 틈에서, 우리는 상옥이라는 인물 안에 남아 있는 한 줄기의 욕망을 보게 됩니다. 더 살고 싶다는 욕망,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은 욕망, 한 번 더 자신을 연기하고 싶은 욕망—그것은 죽음의 그늘 속에서도 여전히 생의 빛을 붙들고 있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떨림입니다. 이제 그의 영화는 단지 반복과 변주의 형식을 넘어서,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려는 한 인물의 내면을 조용히 응시하는 시선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응시는 마침내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꺼지지 않는 생의 의지를 완성해냅니다.
영화 <탑>으로 시작해서 <소설가의 영화>와 <당신얼굴 앞에서>를 통해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다가가 보았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