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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행복

8<그랜드 투어>(2024.미겔 고메스)

by 사붓이 2025.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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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미겔 고메스의<그랜드 투어>는 단지 하나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영화가 아닙니다. 이 작품은 시간과 공간, 현실과 허구, 감정과 형식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불일치의 교향곡을 연주합니다. 포르투갈 리스본 출신의 미겔 고메스 감독은 영화 평론가로 활동하다 <네게 마땅한 얼굴>, <친애하는 8월>, <타부> 등을 통해 국제적인 작가주의 감독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는 다큐멘터리와 픽션, 현재와 과거, 실제와 연기를 뒤섞는 독특한 영화 세계를 구축해왔고, <그랜드 투어>는 그 정점에 놓인 작품입니다.
영화는 1918년, 결혼을 앞둔 남자 에드워드가 약혼자를 두고 도망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비겁한 그의 뒤를 고집스럽게 쫓는 몰리의 여정이 이어집니다. 표면적으로는 사랑과 추격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는 그것을 직선적인 서사로 그리지 않습니다. 고메스 감독은 대본보다 먼저 촬영을 시작했고, 미얀마, 태국, 필리핀, 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을 여행하며  카메라로 현실의 조각들을 수집했습니다. 그렇게 얻은 이미지 위에 스튜디오에서 연기한 배우들의 멜로드라마를 입혀 1918년의 허구와 현재의 현실이 한 장면 안에서 겹쳐지는 독특한 구조를 완성했습니다.
이 영화에는 여러 겹의 그랜드 투어가 존재합니다. 하나는 스튜디오에서 배우들이 재현한 과거의 감정적 여정이며, 또 하나는 실제로 감독과 스태프가 촬영한 현대 아시아의 지리적 여정입니다. 여기에 더해 남자와 여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는 심리적 투어가 얽히며 영화는 하나의 거대한 미로가 됩니다. 고메스 감독은 국가와 시대, 성별과 상상, 픽션과 다큐멘터리 등 서로 분리되어 있던 것들을 하나의 영화적 경험 안에 통합하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곧 시네마의 모든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도망자의 여행, '그랜드 투어'의 현대적 변주

그랜드 투어는 17세기부터 유럽 상류층 청년들이 교양을 쌓기 위해 떠났던 문화 순례로, 근대 유럽 귀족 사회의 통과의례였습니다. 미겔 고메스 감독은 이 전통적인 유럽 귀족의 제국주의적 여행을 20세기 초 아시아를 배경으로 뒤틀어내며, 허구와 현실,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는 독특한 영화적 실험을 시도합니다.
영화 <그랜드 투어>는 1918년, 결혼을 앞둔 영국 정부 공무원 에드워드가 약혼녀 몰리를 두고 랑군에서 도망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혼자서 싱가포르, 방콕, 사이공, 마닐라, 오사카, 상하이 등을 거치며 도망자이자 여행자로 아시아를 횡단합니다. 그러나 그의 여행은 결코 관여하거나 참여하는 형태가 아닙니다. 거리의 인형극, 투계장, 노래방, 수동 대관람차 같은 이국적 풍경들은 에드워드에게 단지 소비되고 관찰되는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그는 타자의 세계와 소통하지 않고, 스스로를 철저히 분리된 관찰자로 위치시킵니다.  고메스 감독은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아시아 각국을 촬영한 이미지를 수집했고, 이 현실적 이미지 위에 허구의 이야기를 얹었습니다. 에드워드의 흑백 장면은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고, 그가 지나치는 도시들은 현재의 아시아가 그대로 드러나는 컬러 영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인공적인 연기와 다큐멘터리적 현실이 한 프레임 안에서 공존하며, 시공간의 불일치가 영화의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모든 영적 고향으로 느끼는 티벳으로 가던 중 인부들에게 강탈 당합니다. 뒤쫓는 몰리가 지나가며 사형당하는 남자들을 목격하지만 영화는 에드워드가 강탈 당한 그 사건의 남자들일거라는 추측이 가능케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내레이션이 인과적으로 단단하게 조직화 하지 않아서 확정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확정할 수 없는 사건으로 관객들이 그렇게 이해할 수 있을거라 여기며 던집니다.  감독은 MUBI와의 인터뷰에서 “관객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1918년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따를 것이다. 왜냐하면 믿고 싶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에드워드는 과거의 인물인 듯하지만 그가 통과하는 세계는 현재의 세계이며, 그 불일치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비개입적 태도는 제국주의적 여행자가 지닌 권력 구조를 재현합니다. 말하자면 <그랜드 투어>의 전반부는 세계를 바라보기는 하지만 결코 손대지 않는, 유럽 중심의 시선과 그 허구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자 해체인 셈입니다.
 

몰리의 여정, 감정의 투어

영화의 전반부가 도망자 에드워드의 여정을 따라간다면, 후반부는 몰리의 시선으로 같은 길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구조는 같아 보여도, 그 의미와 감정의 진폭은 완전히 다릅니다. 고메스 감독은 이 장면 전환을 "관점뿐 아니라 성별이 바뀌는 지점"이라 말하며, 몰리가 등장함으로써 영화는 다시 시작된다고 언급합니다(MUBI 인터뷰).
몰리는 에드워드와 달리 타자와의 경계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녀가 만난 남성들은 단지 이국적 장치가 아니라, 몰리의 치유와 내면의 변화를 유도하는 인물들입니다. 서구 종교에서 말하는 신부의 존재와도 조우하고 그를 통해 해방감을 느낀다는 종교적 구원의 기운을 감지합니가. 몰리에게 있어 여정은 일종의 구도로 보여집니다. 그녀는 여행 중 만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웃고 어울리며, 때론 슬퍼하고 분노하며 감정을 나눕니다. 몰리의 여정은 단순한 추격이 아니라, 길 위에서 하나하나의 만남을 통해 삶의 밀도를 되찾는 과정이 됩니다. 에드워드가 외부 세계에 관여하지 않는 존재였다면, 몰리는 그것에 닿고, 관통하고, 함께 흘러갑니다. 에드워드가 그림을 남기고 몰리가 전보를 보내는 형식으로 영화는 명확한 목적보다는 순간의 감정과 감각을 드러냅니다. 마치 우연히 필리핀의 한 남성이 '마이 웨이'를 부르다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처럼, 예상하지 못한 감정을 영화는 안으로 들입니다. 고메스 감독은 이를 '기획된 무계획'으로 채택하며 단단한 구조보다는 느슨한 감각의 조각들로 영화를 엮었습니다. 이 영화는 중심이 없고 내레이션은 전지적 작가도, 특정한 인물도 아닌 누군가의 불확실한 화자로 구성됩니다. 다양한 언어, 감정이 교차되며 중심이 사라진 서사를 구성하고, 그 속에서 관객은 방향을 잃고 허공에 뜬 감각 속을 걷게 됩니다. 영화 속 이미지들은 특정한 시대나 지리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휴대전화, 시장, 고전 극장, 흑백과 칼라가 공존하는 영상은 어느 시공에도 귀속되지 않는 유동성을 가지고 끊임없이 장르를 뒤집고, 설정을 해제하며 픽션의 탈영토화를 감행합니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네마의 미학적 특권이자, <그랜드 투어>가 제시하는 시간 밖에 존재하는 영화적 시간입니다. 
고메즈 감독은 이 여행이 단지 서사의 복제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세계 체험’임을 강조합니다. 그는 몰리의 여정을 “인형극처럼 다양한 감정과 전통이 교차하는 이야기”로 구상했고(MUBI 인터뷰), 실제로 몰리가 만나는 장면들에는 현지 인형극, 어선, 오토바이 행렬, 시장 등 각국의 문화적 이미지가 그녀의 내면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고메스는 “우리는 특정 사물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으며, 시대착오적인 이미지들의 병치를 통해 몰리의 여정이 단지 과거의 복원이 아닌, 현재와의 감각적 대화가 되도록 구성했습니다.
몰리의 시선은 과거의 허구 속에서 현재의 진실을 만져보려 합니다. 그녀는 배우의 역할이지만, 동시에 여행자이자 감정의 중계자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도착하는 나라는 더 이상 도망의 지형이 아니라, ‘머무름’의 장소로 변화합니다. 그녀는 결국 상하이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그 죽음마저도 영화는 스튜디오에서 인형극처럼 처리하며 ‘삶과 서사의 종결’이 아니라, 반복과 재창조의 한 장면으로 구성합니다. 몰리의 여정은 그래서 에드워드의 여행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한 사람은 현실을 통과하며 외면하고, 다른 한 사람은 현실과 부딪치며 내면화합니다. 그리고 이 둘의 차이를 통해 고메스는 여행과 사랑, 타자와 자아, 허구와 진실 사이의 복잡한 층위를 드러냅니다. 감정의 그랜드 투어는 그렇게, 관찰에서 공감으로, 외면에서 체험으로 옮겨갑니다.
 

오리엔탈리즘과 침묵의 일본

<그랜드 투어>는 이야기와 이미지, 역사와 현재, 현실과 픽션 사이를 끊임없이 흔들리는 영화입니다. 전반부는 흑백 필름으로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1918년의 극적 허구를 바탕으로, 후반부는 컬러로 담긴 현대 아시아의 풍경을 겹쳐놓는 방식으로 구성됩니다. 하지만 이 두 차원은 단순히 나란히 병치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 내내 불일치와 충돌을 거듭합니다. 가장 극적인 불일치는 바로 일본입니다. 에드워드가 여정을 통해 오사카에 도달하는 반면, 몰리의 여정에서는 일본이 철저히 누락됩니다. 오사카는 제국주의의 망령이 가장 짙게 서린 장소이자, 아시아 투어의 정점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몰리는 그곳을 지나치고, 상하이에서 사망합니다. 이 대조는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영화가 품은 중요한 정치적, 역사적 제스처입니다. 일본은 영화 속에서 과거와 현재가 가장 모호하게 교차하는 장소이자, 그만큼 가장 큰 ‘침묵’이 놓인 공간이기도 합니다. 고메스는 인터뷰에서 일본에 대한 특별한 언급을 피했지만, 오히려 그 침묵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암시합니다. 몰리가 일본을 방문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마치 제국주의의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오늘의 일본을 스쳐 지나감으로써 영화가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식으로 읽힙니다.
한편, 에드워드는 각국을 돌아다니면서도 언제나 타자의 시선을 유지합니다. 베트남의 인형극, 태국의 대관람차, 필리핀의 가라오케에서조차 그는 항상 풍경을 관찰하는 자로만 머물 뿐, 어떤 삶에도 진입하지 않습니다. 이는 유럽 남성 여행자의 시선, 다시 말해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특히 그가 만나는 여성들—시장 속 인형극 배우나, 거리의 무명 인물들—은 하나의 ‘풍경’으로만 존재합니다. 아시아 여성은 여기서 타자의 신비로움으로 대상화되고, 그의 여정은 관찰자적 욕망에 의존한 여행의 반복일 뿐입니다. 이러한 시선은 서구 영화 속에서 반복되며, 대표적으로 <게이샤의 추억> 같은 작품에서 드러납니다. 아시아 여성은 종종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지고, 서구 남성의 시선 안에서만 의미를 갖게 됩니다. 고메스는 이러한 감정 구조를 영화 속에서 직접 비판하지 않지만, 몰리가 일본을 누락함으로써 그 지점에 '침묵의 균열'을 남깁니다.
고메스 감독은 MUBI와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인형극과 같다"고 말합니다. “등장인물들이 인형처럼 움직이며, 그들을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 이는 단지 서사 형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자체가 조작되고 구성된 것임을 영화는 정면으로 보여줍니다. 관객은 이 기묘한 ‘문화 인형극’을 따라가며, 어느새 영화라는 허구 자체가 현실을 구성하는 장치임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랜드 투어>는 그런 점에서 하나의 궤적을 그립니다. 허구의 세계에서 현실로, 또 다시 현실 속 허구로 이끄는 미장센의 변주. 말하지 않고도 말하는 일본의 결락, 그리고 감상자에서 실천가로 옮겨가는 몰리의 시선. 그 복잡한 궤적 속에서 영화는 오히려 침묵과 결여로 가장 선명한 질문을 던집니다.

 

허구와 현실 사이, 시네마의 모든 것

<그랜드 투어>는 단일한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 영화입니다. 그 안에는 고전적 멜로드라마의 잔해, 다큐멘터리의 질감, 오리엔탈리즘의 유산, 인형극과 내레이션의 실험, 그리고 촬영과 편집의 즉흥성이 뒤섞여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묘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포스트모던 영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형식의 해체와 장르의 뒤섞임,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흐리는 감각, 관객이 능동적으로 의미를 구성하게 만드는 구성 모두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흑백의 스튜디오 연기와 컬러의 아시아 로케이션 영상이 병치되며 생성되는 시간적 불일치, 즉 “1918년의 이야기인데 2020년대의 영상”이라는 설정부터가 이 영화가 전하는 첫 번째 낯설게 하기의 장치입니다.영화에선 에드워드와 몰리가 여러 국가를 돌아다니지만, 실제론 다수의 장면들이 스튜디오에서 촐영될 예정이었습니다. 로케이션 촬영분과 스튜디오 촬영분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만든 촬영을 먼저 한 후 대본을 쓴 작품입니다. 영화 속 여행은 단지 지리적 이동이 아닙니다. 기차가 탈선하고, 배가 전복되고, 폭동이 일어나고, 미군이 점령하는 순간들, 삶의 위기를 경헙합니다. 동시에 안개의 이미지, 아침의 빛, 물의 흐름, 숲의 정적과 같은 고요한 장면을 병치시켜 위기와 평온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게 합니다. 여행이라는 존재론적 여정이 곧 삶과 죽음, 혼돈과 평화의 교차점임을 말합니다. 이것은 남녀가 쫓고 쫓기는 서사를 통해 실질적으로 구현되며, 이 영화의 내적 목적이 됩니다. <그랜드 투어>는 흑백과 칼라, 다큐와 픽션, 과거와 현재를 무규칙적으로 혼합합니다. 어느 한 체계에 묶이지 않는 이 해체적 방식은 투어라는 단어가 지닌 본질, 목적 없는 방랑, 경계 없는 혼재를 충실히 수행합니다. "당신은 이 여정을 통해 무엇을 보았는가? 태국의 시장, 베트남의 도시, 중국의 골목을 보았는가?" 실제로 본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본 것은 단지 스크린 위에 투사 된 이미지일 뿐입니다. 
 
감독 미겔 고메스는 MUBI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언제나 다른 세계의 규칙을 받아들이고 여행을 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허구의 세계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이 믿음은 단지 영화 속 이야기의 믿음이 아닙니다. 스크린에 펼쳐진 풍경과 감정, 시대착오적 오브제와 목소리, 말의 억양과 이미지의 충돌 그 모든 것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영화는 바로 이러한 ‘믿음의 유예’를 통해 스스로를 보여주는 예술입니다. 현실처럼 보이는 픽션, 픽션 안의 또 다른 현실, 그 모든 경계를 비틀고 넘나드는 가운데 관객은 결국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스스로 질문하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비겁하게 도망치는 남자와 그를 쫓는 여자의 이야기만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시네마가 할 수 있는 모든 형태와 감정, 형식의 실험을 함께 여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랜드 투어>는 일종의 시네마 그 자체에 대한 그랜드 투어이기도 합니다. 결혼, 제국, 타자, 그리고 허구. 그 모든 것을 통과하며, 우리는 스스로 묻게 됩니다. 이 시대의 시네마가 할 수 있는 모든 형태와 감정, 형식의 실험을 함께 여행하는 <그랜드 투어>는 시네마 자체를 사유하는 여정으로 완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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