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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행복

<박쥐>(2009.박찬욱)

by 사붓이 2025.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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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쥐』(2009)는 박찬욱 감독 특유의 미장센과 장르적 실험이 절묘하게 결합된 작품입니다. 피를 먹어야 생존할 수 있는 뱀파이어가 된 신부 상현의 이야기는 초자연적 설정 속에 종교와 윤리, 욕망과 사랑, 구원과 자멸이라는 거대한 질문을 품고 있습니다. 특히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에서 미장센과 카메라 시점을 통해 인간 존재의 이중성과 감당되지 못한 사랑의 파국을 시각적으로 구성합니다.

많은 관객은 이 영화를 에로틱하거나 충격적인 서사로 기억할지 모르지만, 제가 『박쥐』를 다시 바라보게 된 계기는 수업 시간에 들은 “모티브 찾기”라는 말이었습니다. 영화의 겉 이야기가 아닌, 그 중심을 꿰뚫는 질문 하나를 붙드는 순간, 저는 영화 속 장면들이 전혀 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질문은 바로 “상현 신부는 순교자인가, 자살자인가?”였습니다. 이 질문은 영화 전체의 구조와 의미,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떨어지는 신발 하나의 상징까지 모두를 관통하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신부가 태주에게 벗어 신겨준 신발, 그리고 마지막에 ‘툭’ 하고 떨어지는 그 신발은, 단지 오브제가 아니라 이 영화의 핵심 주제, 곧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의 무게를 보여주는 미장센의 결정체였습니다.

 

그림자를 벗어나려 한자, 상현 신부의 실험과 추락

영화 『박쥐』는 병원에서 죽어가는 환자 앞에 무력하게 서 있는 한 신부의 얼굴로 시작합니다. 그는 생명을 구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기도문을 읊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인물 소개가 아니라, 상현 신부가 처한 존재적 절망을 시각적으로 드러냅니다. 종교의 힘도, 기도의 언어도 더 이상 삶을 붙잡지 못하는 세계. 바로 그 지점에서, 상현은 절박하게 백신 실험에 자원합니다. 생명을 살리고 싶다는 의지는 그를 신의 종이 아닌, 과학의 실험체로 이끌고 갑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뱀파이어라는 괴물로의 전환이었습니다.

이러한 서사는 박찬욱 감독이 자주 다루는 경계적 인물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는 선과 악, 구원과 욕망, 인간과 괴물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물을 통해 절대적 기준이 해체된 세계의 윤리적 혼란을 포착합니다. 이 과정에서 박 감독은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을 극대화합니다. 선생님이 수업에서 강조한 것처럼, 영화는 연극과 달리 배우와 관객이 시간과 공간을 함께 나누지 않습니다. 연극이 무대 위에서 모든 것을 드러낸다면, 영화는 카메라의 시점과 편집을 통해 보여줄 것과 숨길 것을 선택합니다.

박찬욱은 바로 이 지점을 집요하게 활용합니다. <박쥐>에서도 그는 관객이 상현 신부의 시선에 깊숙이 침투하도록 구성합니다. 우리는 단지 그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각의 폭풍을 체험합니다. 피에 대한 갈망, 죄책감, 신의 뜻에 대한 혼란, 사랑과 파멸 사이의 떨림. 이 모든 것은 박찬욱 특유의 숏, 신, 시퀀스 구성을 통해 단계적으로 고조됩니다. 예를 들어, 콤마 상태의 환자에게 피를 빨아먹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상현의 눈을 따라갑니다. 그는 죄를 짓는 자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본능에 내몰린 존재로 느껴지도록 연출됩니다.

이러한 장면을 보며 플라톤의 동굴 비유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동굴 속 인간은 벽에 비친 그림자만을 진실이라 믿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진실은 동굴 밖, 태양 아래 존재합니다. 철학자는 그 어둠을 벗어나 빛을 향해 나아가는 자입니다. 상현 신부는 동굴 밖으로 나가려 했던 사람입니다. 제도화된 종교의 한계를 넘어서 진정한 구원을 찾고자 한 그는 실험에 자원하며 동굴 밖을 향합니다. 그러나 그가 도달한 곳은 진실의 세계가 아니라 또 다른 그림자의 세계였습니다. 빛을 보기 위한 여정은 오히려 더 깊고 어두운 내면의 동굴로 그를 이끌었습니다.

결국 상현은 신부도, 인간도, 괴물도 아닌,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중간자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는 피를 마시며 살아가지만, 여전히 인간을 죽이지 않으려 애쓰고, 사랑을 품지만 그것이 파멸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합니다. 이처럼 상현은 플라톤이 말한 ‘진리를 본 자’가 아니라, 그림자에서 또 다른 그림자를 보는 자, 혹은 빛을 보았지만 끝내 타버린 자로 남습니다.

 

 

박쥐, 중간자적 존재의 비극과 에로스의 전이 

영화의 제목이 ‘박쥐’라는 점은 단지 뱀파이어를 암시하는 장르적 설정을 넘어서, 상현이라는 인물의 존재론적 위치를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박쥐는 생물학적으로 포유류이면서도 날개를 지닌 유일한 존재입니다. 들짐승도, 날짐승도 아닌, 그 어느 영역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이 생명체는 마치 신과 인간, 욕망과 윤리, 순교와 자살 사이에서 길을 잃은 상현의 상태를 은유합니다.

상현은 스스로를 구원자로 인식하지만, 현실에서는 누구도 구하지 못합니다. 그는 신의 뜻을 좇지만 신의 방식이 아닌 피의 방식으로 생명을 이어갑니다. 그가 뱀파이어가 되면서 감당해야 했던 것은 단지 생리적 변화가 아니라, 자신의 윤리적 경계가 서서히 붕괴되는 고통이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플라톤의 동굴에서 태양을 향해 나아가려 했으나, 끝내 어둠 속을 헤매게 된 또 하나의 ‘중간자’가 됩니다.

이러한 상현의 내면은 태주와의 관계에서 더욱 복잡하게 드러납니다. 태주는 오랫동안 억압 속에 살아온 인물로, 상현의 사랑과 피를 통해 본능을 해방시킵니다. 이 사랑은 플라톤의 향연에서 말하는 에로스와 닮아 있습니다. 에로스는 육체적 욕망을 넘어 결핍에서 비롯된 상승 욕구, 즉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한 존재를 향해 나아가려는 본질적 움직임입니다. 상현과 태주의 사랑은 단지 육욕이 아니라, 결핍된 존재끼리 서로를 통해 구원을 찾으려는 몸부림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신발처럼 결국 태주의 발에서 벗겨지고 맙니다. 감당할 수 없는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박찬욱 감독의 미장센은 탁월하게 작동합니다. 상현의 피를 처음 마신 태주는 상현과 같은 욕망을 공유하게 되고, 그 피가 들어간 사과주스를 만드는 장면에서는 태주의 피가 잔에 떨어집니다. 이 주스를 마신 사람은 다름 아닌 라여사입니다. 라여사는 이로써 단지 관찰자에 머물지 않고, 신부와 태주의 욕망과 죄의식을 체화하는 새로운 매개자가 됩니다. 그녀는 죄를 지은 것도, 사랑을 나눈 것도 아니지만, 그 욕망과 파멸의 흔적을 육체를 통해 전이받습니다. 이 순간 영화는 관객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상현인가, 태주인가, 아니면 라여사인가?"
이 물음은 관객을 그저 스크린 밖의 시청자가 아닌, 사건의 일부이자 감각의 연장선에 선 존재로 끌어들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를 통해 관객을 에로스적 지위로 올려놓습니다. 에로스란 단지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결핍된 존재로서 사랑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모든 서사와 미장센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향해 수렴합니다. 플라톤은 감각 세계를 넘어서 항구적이며 초월적인 실재, 곧 **이데아(Idea)**가 진정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상현은 신부라는 제도적 지위를 넘어, 뱀파이어라는 경계를 통해 이데아에 도달하려 했던 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끝내 도달한 것은 구원이 아닌 파멸이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진리로 향하는 사다리가 되지 못했고, 태주와의 욕망은 플라톤이 말한 선(善)의 이데아에 닿지 못한 채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박쥐>는 철학적으로도 대단히 정교한 영화입니다. 그것은 단지 종교와 금기, 피와 육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결핍된 인간이 진리와 사랑, 구원 사이에서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철학적 사유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박찬욱은 미장센과 시점을 통해 이러한 사유를 시청각적 감각으로 번역하며, 관객에게 끝내 잊히지 않을 질문을 남깁니다.

 

박찬욱 영화의 철학, 카메라의 윤리, 존재의 조명

박찬욱 감독은 늘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세계에 대한 사유를 보여줍니다.
그는 대사를 통해 설득하기보다는, 화면을 구성하고, 빛을 배치하고, 인물을 프레임에 넣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연출가입니다. <박쥐> 또한 그러합니다. 이 영화는 신과 인간, 구원과 욕망, 선과 악의 경계에 선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고, 또 어떤 결말에 도달하는지를 시각적 장치로 조용히 묻는 영화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올드보이>,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를 통해 복수라는 주제를 세 가지 방식으로 해석해냈습니다. 그 복수는 단순한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도덕적 윤리의 한계, 정의와 자의적 응징의 모순, 권력과 젠더, 계급의 대립과 얽혀 있습니다. 이처럼 박찬욱은 영화를 통해 늘 묻습니다.
“우리는 복수할 권리가 있는가?”
“우리는 누군가를 심판할 만큼 윤리적인가?”
“사랑은 죄를 용서하는가, 아니면 정당화하는가?”

<박쥐>는 이 복수 3부작의 연장선에서, ‘구원’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드러냅니다.
상현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태주를 뱀파이어로 되살리고,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그녀와 파멸을 공유합니다. 그는 선을 행하려 했지만, 그 방식은 윤리를 침범하고, 종교를 훼손하며, 타인의 존재를 무너뜨립니다. 여기서 박찬욱 감독은 ‘복수’가 아닌 ‘구원’이라는 윤리의 탈을 쓴 행위를 해체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파국을 관객이 직접 목격하게 만듭니다. 이 질문은 곧 “너 누구냐?”는 질문으로 수렴됩니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강제 감금이라는 미로를 뚫고 나오는 존재입니다. 그는 고통의 동굴을 헤매며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묻습니다. 박찬욱은 오대수를 역광으로 배치하여 정체를 알 수 없는 실루엣으로 그립니다. 이는 마치 플라톤의 동굴 속 죄수처럼, 스스로를 정의하지 못한 채 벽에 비친 그림자만 바라보는 존재와도 같습니다.

반면 <박쥐>의 태주는 환한 빛 속에 놓입니다. 그녀는 욕망을 숨기지 않습니다. 남편이 자는 밤, 창밖을 향해 발버둥치며, 결국 그 갈망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갑니다. 태주는 오히려 빛 속에서 죄를 짓고, 상현은 어둠 속에서 구원을 갈망합니다. 이러한 조명과 카메라 워크의 차이는 두 인물 사이의 간극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며, “너는 누구냐?”라는 철학적 질문을 관객 스스로에게 되묻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이때 박찬욱이 제시하는 윤리의 무게는 단지 신학이나 도덕의 범주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철학, 윤리학, 젠더, 종교, 정치성 등 다양한 논제를 끌어들입니다. 그래서 <박쥐> 속 사랑은 단지 남녀 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가 타자와 맺는 관계, 욕망이 타인의 삶을 어떻게 잠식하는가, 그리고 도덕이 욕망 앞에서 얼마나 연약해지는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입니다. 박찬욱의 이러한 연출 방식은 플라톤의 이데아론과도, 실존주의 철학과도 관계합니다. 이데아는 감각을 초월한 진리의 세계입니다. 반면 실존주의는 감각 속 고통과 책임의 세계입니다.<박쥐>의 상현은 이데아를 추구한 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욕망의 세계에 머물렀고, 끝내 실존의 고통에서 탈출하지 못합니다. 그의 몸은 타오르지만, 그의 구원은 불완전하며, 그의 사랑은 파괴를 낳습니다.

 

작가주의 감독의 날인, 말 없는 철학의 층위 

 

영화 <박쥐>는 끝내 상현의 선택이 순교였는지 자살이었는지를 명확히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는 사랑을 통해 구원하고자 했지만, 그 사랑은 욕망과 맞닿아 있었고, 그 구원은 결국 파멸로 이어졌습니다. 태주 역시 사랑받고자 했지만, 결국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신발이었습니다. 이들의 사랑은 완성되지도, 용서받지도 않았습니다. 불에 타고 남겨진 신발 하나가 그 모든 감정의 찌꺼기처럼 툭 떨어져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관객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끝나지 않는 질문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영화가 단순한 이야기 전달을 넘어, 복합적인 질문과 사유를 미장센이라는 영화언어로 구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미장센을 "감독의 시선이자 주제이며, 작가주의를 가능케 한 날인(捺印)"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즉 미장센이란 단순히 화면 구성이나 배경의 장식이 아니라, 감독이 관객에게 말없이 건네는 철학의 구조입니다. 『박쥐』의 미장센은 빛과 어둠, 숏의 길이, 인물의 배치, 오브제의 등장 방식까지 철저하게 계산되어 있습니다. 신발 하나, 피가 섞인 사과주스 한 잔, 마작판에 앉은 태주의 위치는 모두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질문의 구조물입니다. 이처럼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논쟁 – 신과 인간, 사랑과 욕망, 도덕과 파괴, 젠더와 윤리 – 은 모두 미장센의 층위 속에서 실현되는 철학적 투쟁입니다. 따라서 이 영화는 단지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여주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또한 이 영화는 디제시스(diegesis) – 즉 영화 안에서 펼쳐지는 세계 – 와 그 안에서 감춰진 하위 텍스트(subtext)의 충돌을 통해 관객의 감정을 흔듭니다. 표면적으로는 금기를 넘은 사랑 이야기지만, 그 아래에는 무능한 구원자, 감당되지 않는 구원, 전이되는 죄와 욕망, 실재를 갈망하지만 닿을 수 없는 존재의 불안이 층층이 깔려 있습니다. 관객은 이 하위 텍스트의 깊이를 인지할 때 비로소 진정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카타르시스는 감정의 배설이 아니라, 철학적 성찰과 윤리적 갈등, 그리고 인간 존재의 슬픔에 대한 깊은 공감에서 비롯됩니다. 결국 영화 『박쥐』는 사랑이 구원이 될 수 있는가, 욕망은 죄인가, 신은 존재하는가와 같은 답 없는 질문들을 감각적으로 제시하는 철학적 예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박찬욱이라는 작가 감독의 미장센 안에서 말없이, 그러나 강력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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