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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행복

<퍼펙트 데이즈>(빔 벤더스.2023)

by 사붓이 2025.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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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이 행복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독일의 거장 (빔 벤더스)가 연출한 작품으로, 일본 도쿄의 공중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의 일상을 섬세하게 그려낸 드라마입니다. 2023년 5월 25일에 제 76회 칸 영화제에서 최초로 상영되었으며 주연 배우 야쿠쇼 코지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한국엔 2024년 7월에 개봉해 히라야마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발견되는 작은 변화와 아름다움을 통해 삶의 무상함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의미를 느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야쿠쇼 코지의 섬세한 연기는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연산홍 바다 위 등대, 동북각루의 해질녘

새로운 풍경이 즐거워 예상보다 많이 걸었습니다. 저녁 산책으로 해질녘을 바라본 지 10년이 되었지만, 매일이 새롭게 느껴집니다. 어느 날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붉은 노을이 타오르는 광경에 넋을 놓고 말았습니다. 눈도 바쁘고 머리도 바쁘게 정신없이 걷다가 동북각루 너머의 해질녘에 멈춰 섰고, 그날 이후 그곳은 저의 산책 코스가 되었습니다.
방화수류정의 용연을 따라 오르는 둔덕은 저에게 계절을 알아차리게 하는 스승입니다. 햇살에 녹은 눈처럼 겨울이 사라지고, 새순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봄의 촉촉한 땅을 밟으며 언덕의 바람결에 실린 매화 향이 콧속을 간질입니다. 수수꽃다리가 여름 향기를 듬뿍 안고 계절을 일러주는 순간, 속삭이듯 말합니다. "봄이야."
4월의 영산홍이 붉은 바다처럼 피어날 무렵, 동북각루 너머의 해질녘은 아찔합니다. 그러나 단 하루도 똑같은 풍경은 없습니다. 매일 같은 장소이지만, 빛은 하루에도 몇 번씩 결을 바꾸고, 그림자는 매번 다른 이야기를 남깁니다. 영화 속 히라야마가 매일 찍는 사진, 코모레비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입니다. 코모레비는 그 순간에만 존재합니다. 제가 찍는 해질녘 사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히라야마의 내면과 맞닿은 방화수류정의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제 가슴을 벅차게 하기도 하고, 눈물을 차오르게도 합니다. 존재함의 순간으로 들어가는 이 경험을 통해 저는 영화를 만났습니다. 무상을 눈으로 보아 버렸습니다. 세상이 어제와 다르게 보였습니다.

 

2021년 4월 동북포루 해질녘

 

히라야마의 하루, 사라지면서 남는 것들

 

영화 속 히라야마는 매일 같은 루틴을 반복하며 하루를 살아갑니다. 이웃의 비질 소리에 잠에서 깨어 양치를 하고 화분에 물을 줍니다. 옷을 갈아입고 소지품들을 정갈하게 챙겨 현관문을 여는 그의 얼굴에 햇살이 닿으면 미소로 인사합니다. 캔 커피를 들고 작은 봉고차에 올라 카세트 테이프를 틀어 음악을 듣습니다. 말이 없는 히라야마를 대신해 음악이 그의 감정을 노래합니다.
도쿄를 지나 시부야 공중화장실에 도착한 그는 어린 동료 다카시와 일상의 단면을 그려 나갑니다. 그의 하루는 반복되지만, 그 안의 작은 변화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이 영화의 묘미입니다. 햇살이 비추는 각도, 화장실에서 스치는 사람들, 다카시의 여자친구 아야와의 우연한 접촉. 그 중 아야에게 볼 뽀뽀를 받을 때 히라야마는 가장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의 미소와 다카시 친구의 흉내를 내며 귀를 당기는 장면은 영화를 보는 저에게도 따뜻한 감정을 안겨주었습니다.
매일 찍는 코모레비, 그리고 꿈속에서도 등장하는 그 햇살은 히라야마의 내면을 표현합니다. 저 역시 십 년 이상 설거지 일을 반복했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를 빙빙 돌며 그릇을 닦고 청소를 했습니다. 그 하루 속 저녁 산책 시간이 저의 코모레비였습니다. 영화 보러 가는 길에 용연을 지나며 연둣빛이 반짝이는 해질녘을 만났고, 히라야마의 내면과 마주했습니다.
히라야마가 화장실을 청소하며 마주하는 다양한 감정의 결은 때로 찌릿한 통증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이를 손잡았을 때, 그 엄마의 힐끗한 눈초리는 갈비뼈 아래를 퍽 치듯 아팠습니다. "어떨 땐 아주 슬퍼요, 어떨 땐 아주 행복해요" 라는 노랫말은 제 안의 내면아이에게도 닿았습니다. 설거지를 하며 느꼈던 모멸감은 바로 이런 순간에 스며들었습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여도 내면에 복잡한 감정이 숨겨져 있던 저의 모습을 히라야마의 음악이 섬세하게 비추었습니다.
"괜찮아, 이대로 음악과 함께 흘러가도 괜찮아." 그림자를 토닥이듯 제 내면의 아이를 어루만졌습니다.
 
 

2023년 4월 동북포루 해질녘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

히라야마의 단단한 루틴 속에 말 없는 파문이 찾아옵니다. 여동생의 딸, 조카 니코가 가출하여 삼촌에게 옵니다. 삼촌이 읽는 책을 읽고 싶어 하며, 화장실 청소 일도 함께 하겠다고 따라 나섭니다. 일을 마친 뒤, 히라야마와 조카는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달립니다.
"엄마 말이 삼촌은 우리랑 다른 세상에 산대." "세상은 수많은 세상으로 이뤄져 있어. 연결된 것처럼 보여도 그렇지 않은 세상도 있지. 내가 사는 세상과 니코 엄마가 사는 세상은 많이 달라." "난 어느 쪽 세상에 사는데?" "이 강을 따라가면 바다야." "갈까?" "다음에." "다음은 다음이지." "다음이 언제야?" "다음은 다음이고, 지금은 지금이야."
조카 니코와 삼촌은 어떤 마음을 싣고 강변을 달렸을까요. 엄마의 세상에 속하지 못한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히라야마가 여동생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청소 일을 한다고 대답할 때, 그의 속마음은 쉽게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여동생을 안아주며 보내고, 눈을 껌뻑이다 이내 일그러지는 표정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습니다.
설거지로 시작된 하루, 체념과 수용의 자세로 버텨낸 10년의 시간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수많은 식판을 씻으며 세상의 분노와 슬픔, 억울함과 상처를 함께 씻어냈습니다. 누군가는 물때만 본 그릇에서 저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았고, 그 마음을 손으로 씻어냈습니다.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긴 적도 있었지만, 히라야마가 화장실을 닦는 장면은 그 일이야말로 저를 지탱해 준 깊은 수행임을 깨닫게 했습니다.
히라야마가 흔들렸던 이유는, 그의 마음 어딘가에 여전히 ‘전에 머물던 삶’의 잔향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흔들림을 억누르지 않고, 다음 날도 아침을 살아냅니다. 어느 때와 다름없이 현관문을 열고 햇살에 미소 지으며 화장실 청소 일을 향해 나아갑니다.
 

2025년 4월 동북포루 해질녘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존 브래드쇼의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 서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나는 지나간 나의 어린 시절을 되돌려 받고 싶다.” 이미 오래전에 떠나간 그 시절의 아이가 지금도 제 안에 살고 있습니다. 제 마음 문 뒤에 서서, 혹시라도 무슨 멋진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오랫동안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아이에게 멋진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퍼펙트 데이즈>는 그 아이를 그림자처럼 만날 수 있는 장면을 영화 후반에 배치했습니다. 하루가 엉망으로 꼬여버린 히라야마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옵니다. 단골 선술집 여주인의 전 남편이 시한부 인생으로 등장합니다. 우연이지만, 원래 행복은 그런 우연에서 오는 선물인지도 모릅니다.
이 두 중년 남성에게 어떤 우연한 행복이 찾아왔을까요? 강변을 바라보며 전 남편은 말합니다. “그냥 만나고 싶었어요. 사과보다는 감사하고 싶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네요.” 그리고 이내 말합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히라야마는 그를 데리고 그림자 밟기를 하자고 제안합니다. 어린 시절을 잠시 되돌려주는 장면입니다. 두 사람은 웃으며 뛰놀고, 그 웃음 속에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습니다. 저 역시 눈물이 고였습니다. 몸을 벗어버리면 그림자도 없습니다. 어린아이는 놀이할 때 그 순간에만 존재합니다. 세상은 무상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림자 속에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던 저의 어린 시절 상처가 조용히 일어나, 춤을 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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